주희에게

1.
어느 때부터 누군가와 함께 무엇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응원합니다. 작더라도 할 수 있으면 참여를 하려고 합니다. ‘함께’를 만드려는 사람들의 노력, ‘결과’로 얻을 수 있는 상처와 감동을 알고 있기때문입니다.
동네 과천풀뿌리와 영광교회가 공동으로 만든 공동체상영입니다. 과천에 살면서 처음으로 교회를 가보았습니다. 성당과 무척 다르네요. 젊은 시절 거의 상주했던 성문밖교회와 달랐습니다. 개척교회같은 느낌입니다. 나무가지로 만든 십자가는 성당 성전에 걸린 십자고(苦)상과 너무 다릅니다. 주님의 수난보다는 우리와 함께 사는 주님을 느낍니다.

‘아무런 사전 정보없이 본 ‘주희에게’

예상과 다른 영화였습니다. 세월호 부모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장애인, 4.3 , 세월호로 얽히고 설킨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다. 제가 기억하는 연대는 조직과 조직이 만나 큰 틀로 이루어지는 연대였습니다. 노학연대도 그렇고 노동자연대도 그렇고, 민중연대도 그랬습니다. 영화가 그리는 연대는 다릅니다. 조직보단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심입니다. 서로간에 삶에 이해하고 공감하고 투쟁에 동의하고 함께 합니다. 요즘의 연대로 이해했습니다.

시대는 거대담론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삶에 함께 하는 다양한 연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듯 합니다. 이런 씨줄날줄이 함께 모여 만든 것이 빛의 광장이네요. 영화는 그날 국회와 광화문에서 함께 모습을 비춥니다. 그 때 그 장소에 날리던 수많은 깃발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처럼 세상의 모든 주희, 철규, 인숙, 성필을 응원합니다.

2.
공동체상영으로 ‘주희에게’를 본 이후 머릿속에 계속 남는 장면은 철규입니다. 철규의 버킷 리스트중 하나인 번지점프를 위해 국내 어딘가를 찾았습니다. 사전에 관련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서 찾았지만 현장은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레저시설을 담당하는 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사고의 책임에서 자유로우려면?”

반면 철규씨는 강력히 스스로의 권리를 옹호합니다. 정확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습니.

“나는 번지점프를 할 권리가 있고 이미 전문가의 상담도 받았고 훈련도 했다”

제가 당혹한 것은 이런 의견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적대적, 공격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한 지하철 탑승시위를 할 때 뉴스속 앵글과 닮았습니다.
왜 이런 반응이었을까? 영화이후 계속 고민했던 주제입니다. 탈시설 장애인이 세상으로 인정받기 위한 과정에서 쌓인 태도일까..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세상이 귀 기울여주지 않는 무언가를 인정받기 위해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 무의식적으로 – 반응을 합니다. 그것이 공격적이라 불리우든 냉혹하다고 평가를 받는, 삶속에서 만들어졌을 듯 합니다.
아마도 이런 투쟁이나 활동은 정체성 정치라고 불리우는 듯 합니다. 정체성 정치의 시작은 ‘자존감에 대한 열망’(the carving for dignity)’이라고 어떤 보고서는 말합니다. 정체성 정치의 목표는 충분한 인정이라고 합니다.
인숙이 민사소송을 한 이유도 국가부터의 인정일 듯 합니다. 제가 저를 바라보아도 내 자신도 모르는 트리거가 있습니다. 이를 건드리면 태도가 바뀌고 감정이 겪해집니다. 삶을 부정한다는 생각이 들기때문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호주 번지점프 운영회사에서 답장을 줍니다.

“장애인도 번지점프가 가능하다.”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이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현실. 이를 줄여나가는 것, 과제입니다. 또한 어렵습니다.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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