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감동적이었던 주말 신문

1.
보수와 진보의 공존.? 부모님은 조선일보와 덤으로 배달되는 한국경제신문, 저는 한겨레신문을 봅니다. 돈을 내고 볼 필요는 없지만 퇴근길 다 본 신문을 펼칩니다. 조선일보 주말판은 무척 재미있습니다. 한겨레신문이 소개하는 신간소식도 좋지만 새로 시작하는 컨테이너선 동행기가 흥미롭네요.? 그럼에도 조선일보 주말판인 위클리 비즈와 Why?에 실린 기획기사가 너무 좋았습니다.

[Weekly BIZ] [Story] 윤호일 남극대장의 그 어느날
[Why] [김윤덕의 사람人] 자갈밭을 최고의 정원으로 일군 ‘생각하는 정원’ 성범영 원장

묵묵히 한 길을 걸어온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감동입니다.

2.
위클리 비즈가 윤호일 남극대장을 소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1년 365일 하루도 편하지 않은 그래서 항상 긴장감을 가지고 위기에 대처하여야 하는 남극이 마치 기업이 놓인 현실과 같기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지만 저의 가슴을 울린 것은 회사의 문을 닫아야 했던 마지막 순간,위기와 중첩되었기때문입니다. 만약 글이 인터뷰 혹은 기고문이었으면 딱딱했을텐데 강연을 그대로 옮겨놓아 더 생생했습니다. 강연의 제목은? ‘남극 세종기지를 지켜낸 위기관리 리더십’.이라고 하더군요. 요즘 잘 나가는 강사이고 강연이라고 합니다.(^^)? 글을 읽다보면 남극은 어디 먼 곳에 있는 오지가 아닙니다. 바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 혹은 기업 혹은 조직이 바로 남극입니다.

가장 큰 느낌을 받은 대목은 ‘조직을 망치는 낙관론’이라는 부분입니다. 사례 일로 들었던 부대장이 딱 저입니다. “이번 분기면 가능해. 재무적으로 나아질 수 있어.” 현금흐름이 최악인 때 저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어찌보면 낙관론이 나를 망치게 했고 회사를 무너트렸습니다. 마지막 리더가 가져야 할 덕목으로 ‘정직·균형감각·인간미’를 말합니다. 남극과 덕목을 이어서 생각하니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떠오르더군요. 중소기업은 사람도 자원도 항상 부족합니다. 매일 남극과 같습니다. 사람을 짜를 수도 없습니다. 대체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기때문입니다. 그래서 남극에서 살아갈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남극기지 대장’이라면 사람들은 허용호·엄홍길과 같은 초인(超人), 극지(極地)에 도전하는 강인한 모험가를 연상한다. 하지만 그는 화려한 사람이 아니다. 해양학 석·박사를 받고 해양연구원을 떠난 적이 없는 학자다. 그를 대장으로 따른 대원 15명도 대부분 이공계 연구자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남극은 어떤 곳일까. 7~8개월 동안 해가 뜨지 않고, 2~3개월 동안 해가 지지 않는 곳. 얼음칼이 날리는 폭풍설에 고립됐을 때, 평범한 조직은 어떻게 흔들리고 어떻게 유지되는가. 대원 8명이 조난당해 1명이 숨지는 아픈 기록을 남긴 17차 월동대. 바꿔 말하면 조난자 8명 중 7명이 얼음칼을 뚫고 귀환한 기적의 월동대이기도 했다.

그는 ‘극한(極限)의 리더십’을 말한다. 하지만 초인이 연출한 성공 신화는 한 구절도 나오지 않는다. 평범한 리더들이 극한의 상황에서 어떻게 조직을 유지했는가를, 아픈 경험을 통해 들려줄 뿐이다. 그래서 청중들은 그에게 공감하고 박수를 친다. 그들 모두, 언젠가 절망적 위기를 겪을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남극기지의 생활이란

남극 대장이라고 하면 허영호·엄홍길을 떠올려요. 초인들이죠. 그들은 20일 탐험하고 나와요. 우리는 다 호리호리한 이공계예요. 그들만큼 체력도, 정신력도 좋지 않아요. 그냥 1년을 살러 가는 거예요. 남극은 투입되면 1년 동안 나갈 수 없어요. 그래서 맹장을 떼 놓고 와요. 수술을 할 수 없으니까. 대원들이 “괜찮은데 설마…” 그래요. 일본·미국 기지에서 안 떼고 갔다가 개죽음한 사례를 보여줘요. 그러면 출국날 다 수술하고 와요.

남극 대원이라고 하면 깍두기 머리에 검은 피부를 생각하지요? 아니에요. 남극의 여름은 1·2·3월. 24시간 해가 지지 않아요. 4월부터 겨울이에요. 이때부터 7~8개월은 해가 없어요. 주구장창 실내 생활이에요. 매일 12시간씩 얘기해요. 두 달 지나면 같은 얘기를 7~8번쯤 해요. 나중엔 각색을 하기 시작해요. 안중근·윤봉길 막 나와요. 고스톱 아시죠? 똑같은 사람들끼리 하루 12시간씩 고스톱을 쳐요. 그러다 싸워요. “우리 고향 법칙은 이렇다”면서. 그리고 또 쳐요.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계속 왜곡해서 들어요. 오해만 해요. 한국에선 친한 동료와 술 한잔하고 집에 들어가 자녀에게 입맞춤하고 풀어요. 우리 모두 그렇게 여기까지 살아온 거예요. 그런데 남극에선 나 하나 건사하기 어려우니 친한 동료가 없어요. 특히 가족이 없어요. 남극의 스트레스는 쌓여만 가요. 그러면 피해의식으로 발전해요. 남이 나를 조롱한다고. 술을 먹고 해롱해롱하다가 또 싸워요.

남극은 싸웠다고 갈 곳이 없어요. 살벌하게 싸운 사람들이 다음날 함께 밥 먹고 고스톱을 쳐야 해요. 그러다 여름에 탐사를 나가요. 그러다 얼음바다에 빠져요. 그때 대원들에게 희생을 요구해야 해요. 협동심과 신뢰를 끌어내야 해요. 이게 남극의 리더십이에요.

◆똘아이 대원의 변화

조직은 상대적이에요. 느린 사람이 있어요. 느리다 못해 왕따당해요. 그러면 똘아이 짓을 하게 돼 있어요. 생명줄까지 건성으로 묶는 똘아이가 있었어요. 생명줄은 아주 타이트하게 잘 엮어야 해요. 어느 날 한 대원이 똘아이와 함께 나갔다가 크레바스(crevasse·빙하의 표면에 생긴 깊은 균열)에 빠졌어요. 절벽으로 떨어지는데 똘아이가 묶은 생명줄이 풀린 거예요. 다행히 20m 아래에서 절벽이 좁아지면서 몸이 끼었어요. 살아 올라온 대원은 동물 울음소리를 내면서 피켈을 들고 똘아이를 죽이겠다고 했어요.

그렇다고 똘아이를 내보낼 곳도 없어요. 그래서 장점만 봤어요. 어느 날 폭풍이 불었어요. 밖으로 나가 고무보트를 동여매야 해요. 똘아이가 갑자기 특수복을 입고 고글을 끼고, 오버 액션을 하는 거예요. 그러다 결국 가장 늦게 나갔지만. 그래도 대원들을 불러서 칭찬했어요. “너희가 꾸물거리고 있을 때 특수복을 가장 빨리 입었다”고. 거품을 물면서 얘기했어요. 리더라서. 그 대원이 달라지기 시작해요. 눈에서 살기가 없어져요. 쿵쿵거리던 슬리퍼 소리가 스윽스윽 소리로 바뀌었어요. 경직된 몸이 풀렸다는 얘기예요.

바로 이거예요. ‘우리 대장님이 드디어 인정해줬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굉장히 힘들어요. 리더십 교육도 받지만 잘 안돼요. 내 갈 길도 바쁘니까. ‘화딱지 나는데 칭찬은 무슨?’이런 생각도 들어요. 남을 인정하는 건 반복 연습이에요. 연습을 하면 피드백이 반응이 와요. 슬리퍼 소리에서도 느껴져요.

◆위기는 어디에서 왔나

2003년 12월 15명을 끌고 남극에 들어가자마자 실종사고가 났어요. 부(副)대장이 부하 두 명을 이끌고 남극 바다에서 기지로 귀환하던 도중 폭풍설을 만나요. 12시간, 24시간이 지나고 48시간. 이틀은 남극의 여름에 인간이 버틸 수 있는 한계예요. 그때부터 얼어 죽어가는 거예요. 저는 책임자예요. 어떻게 부하의 얼어붙은 시신을 아이들에게 “네 아빠다”라고 건네줄 수 있습니까? 바싹바싹 마르지요. 구조대 5명을 보냈어요. 7시간 뒤 무전이 날라왔어요. “찾았습니다”가 아니에요. “우리 보트도 뒤집혔고… 살려주세요.” 대원 15명 중 8명이 실종된 거예요. 남극에서 실종은 거의 죽음이에요.

우리는 지위가 올라갈수록 ‘큰 위기는 없겠지’ 생각해요. 아니에요. 올라갈수록 확률이 더 커져요. 부하가 많아지기 때문이에요. 그들의 실수가 나를 위기로 몰아넣어요. 위기는 그들로부터 와요. 나의 실수? 사고? 아니에요. 주변에 의해서 한방에 나가떨어지는 거예요. 막판에 더 그래요. 애들 학비도 벌어야 하고 노후도 생각해야 하는 그 순간 운명의 화살이 나에게 오는 거예요. 능력? 완장? 경험? 비전? 다 개뿔이에요. 위기의 도도한 흐름에 그냥 쓸려가는 거예요.

◆공포가 무서운 이유

남극기지의 아르헨티나 대원들이 귀환 도중에 폭풍설을 만났어요. 폭풍설이 오면 전진하면 안 돼요. 이게 원칙이고 기본이에요. 아르헨티나 대장은 대원들에게 전진 명령을 내렸어요. 서두르면 따뜻한 난로와 밥이 기다리고 있어요. 이런 작은 생각에 기본을 잊은 거예요. 조직을 이끈다는 책임을 망각한 거예요. 그러다 두 명이 크레바스에 빠졌어요. 악어 이빨처럼 울퉁불퉁한 V자 골짜기로 150m를 떨어졌어요. 한 명은 즉사하고 한 명은 살았어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요. 살아난 카를로스는 자기 발에 찬 아이젠과 즉사한 동료의 아이젠을 풀어서 팔뚝에 묶었어요. 올라가기 위해. 찍으면서 올라가다가 미끄러지고, 올라가다가 미끄러지고. 카를로스는 7시간 만에 숨졌어요. 아마추어도 버티는 시간이에요. 특수부대 출신이. 어둠과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끝없이 오르다 체력이 고갈돼 다운된 거예요.

카를로스는 크레바스에서 최소 48시간을 버틸 수 있었어요. 죽은 동료의 옷은 젖지 않았어요. 동료의 배낭엔 식량도 있었어요. 본인의 체온과 식량이 떨어지면 그걸 사용하면 됐어요. 버티면서 교신을 시도할 수 있었어요. 공포를 받아들이면 됐어요. 하지만 그는 ‘당장 올라가지 못하면 죽는다’는 공포에 밀렸어요. 그게 그를 패배시킨 거예요. 패배의식이 그를 죽인 거예요. 공포가 무서운 것은 1보(步) 전진을 막기 때문이 아니에요. (살 수 있는) 현재 위치마저 갉아먹기 때문이에요.

허약한 사람은 위기 때 두려워해요. 짜증을 내요. 내 잘못이 아니라며 외면해요. 그런다고 내 앞에 있던 위기가 절로 나간 적 있습니까? 계속 내 앞에서 깔짝거려요. 절대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나가질 않아요. 위기를 함께 하는 법을 배울 때 결국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예요.

◆조직을 망치는 낙관론

조난당한 우리 부대장은 눈보라 속에서 죽을 힘을 다해서 유빙(流氷·물 위를 떠다니는 빙하)을 헤쳤어요. 시동을 걸고 바다 얼음을 꾹꾹 눌러대면서 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유빙의 힘은 고무보트를 뚫었어요. 더 전진하면 침몰이죠. 결국 유빙을 피해요. 그러면 수심 5000m의 남극해로 흘러가요. 펑크난 고무보트, 바닥난 연료통을 가지고. 흘러가면 죽음이에요. 집채만한 파도가 나오거든요. 그래서 빙하 위로 몸을 던진 거예요. 식량도 없었어요. 온몸이 젖었어요. 추위와 싸우던 어린 부하 두 명은 너무 견디기 어려웠어요. 처음 당해본 조난이었어요. 리더에게 물을 수밖에 없어요. “언제 구조대가 옵니까?”

이럴 때 리더는 일단 조직원을 안심시켜야겠다고 생각해요. 낙관적으로 얘기해요. “아무것도 아니다. 금방 날씨 좋아진다. 힘을 내자.” 어린 부하는 따르죠. 그렇게 다시 24시간을 버텨요. 그리고 다시 물어요? “언제 구조됩니까?” 리더는 12시간이 지났을 때 “곧 좋아진다”고 해요. 그래서 희망을 갖고 리더에게 의지해요. 그런데 24시간이 지나도 바람은 똑같이 오는 거예요. 다시 물어요. 리더는 바로 앞의 위기만 모면하려고 “조금만 더 참자”고 말해요. 일단 따르죠. 그러다 48시간이 지나요. 인간의 한계 지점이지요. 부하들은 견디기 어려운 공포예요. 포기하고 싶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리더에게 묻고 싶어요. 리더밖에 없으니까. 이때 리더가 “몇 시간만 더 참으면 된다”고 설득하면 부하들이 견딜까요? 아니죠. 이때부터는 말이 통하지 않아요.

문명사회 리더는 위기의 순간에 답을 몰라요. 그래서 낙관론으로 바로 앞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해요. 조직원에게 낙관론만 입력을 시키면 마지막에 되돌릴 수 없어요. 각자 길을 떠나요. 조직이 무너지는 순간이에요. 위기일수록 최악으로 빨리 내려가야 해요. 서성거리면 늦어져요. 가장 밑바닥에서, 최악의 기준에서 정신력을 회복해야 해요. 일본 정부는 원전을 살리기 위해 바로 앞에 있는 위기만 팠어요. 또 위기가 닥쳐요. 최악의 위기까지 갔을 때 이제 아무도 믿지를 않아요.

◆조직을 움직이는 힘

부대장은 알았어요. 빙하 위로 내리자마자 말했어요. “잘 들어라. 남극에 눈보라가 한 번 불면 최소 만 3일 간다. 그전에 그친 적은 없다. 우리가 살려면 만 3일은 기본적으로 버텨야 한다. 다른 나라 대원들도 수년 전에 탐사활동을 벌이다가 조난을 당했다. 만 3일 이상을 다 참았다. 다 살아났다.” 사실 만 2일이면 다 끝나요. 최악의 기준을 제시해서 동기부여를 한 거예요. 3일 동안 무조건 버티게끔. 이들은 “3일은 기본이래. 다 버텼고 다 살아났대”라고 자기 동기를 부여했어요. 12시간 지났을 때 대원들은 두려웠어요. “그래도 3일이 되려면 아직 멀었어. 중국놈들도 살았는데 나라고 왜 못 살아.” 다시 동기를 부여했어요. 스스로 움직인 거예요. 다 무너진 조직을 살린 건 완장이 아니었어요. 능력도 아니었어요. 동기를 부여해 그들을 움직였기 때문이에요. 그게 리더십이에요.

함께 조난당했다가 살아남은 구조대원도 마찬가지예요. 보트가 기우뚱하는 순간에 ‘이건 뒤집힌다’고 느꼈어요. 위기를 받아들인 거죠. 얼음 파도를 정면으로 보지 마라. 이게 철칙이에요. 정면으로 보면 시멘트 콘크리트 반죽이 영원히 밀려오는 듯한 착각에 빠져요. 대원들은 몸을 틀었어요. 수없이 연습했거든요. 파도가 오면 숨을 안 쉬고, 골이 오면 숨을 쉬고. 그렇게 떠 있으면 바람 때문에 연안에 닿을 수 있어요. 위기의 본질이 몸에 배 있느냐에 따라 조직의 운명이 달라져요.

◆정직·균형감각·인간미

위기 때 조직을 움직이는 리더십? 다른 거 없어요. 정직이에요. 제 경험이 있어요. 크레바스 탐사를 나갔을 때 제 결정으로 몰살당할 뻔한 상황이 있어요. 대원들은 대장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대장이 사과하기를 바랐어요. 저는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날 저녁 부대장이 “대장님, 간접적으로라도 사과하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1년을 더 지내야 합니다”고 했어요. 저는 완장에 기대서 반대했어요. 항변했어요. “나는 가이드라인에 따랐다. 그들이 오버했다. 너희가 잘못했다”라고. 다음날부터 모든 리더십이 부대장에게 넘어갔어요. 아무 힘을 쓸 수 없었어요. 나는 완장만 차고 있었지.

조직엔 늘 모자란 사람이 있어요. 이들을 잘라버리고 강한 대원으로 생산성을 높이는 게 리더십이 아니에요. 뒤처진 자를 자르면 또 뒤처진 자가 나와요. 그럼 또 자르고 계속 잘라요. 그러면 마지막에 나를 지켜줄 부하는 없어요. 리더십은 뒤처진 자가 일어설 수 있는 여건과 기회를 마련해 주는 균형감각이에요.

마지막으로 사람 냄새가 나는 리더십이 필요했어요. 위기에서 조직을 움직이려면 “우리 리더는 성질도 더럽고, 실력도 없어. 그런데 위기엔 자기를 희생해서 조직을 살리고 우리를 위할 사람 같아”라는 이미지가 필요해요.

남극기지엔 원칙이 있어요. 크레바스에 빠진 동료를 위해 생명선을 잡고 있어도 4~5시간 후 하반신 마비(동사 위기)가 오면 생명선을 끊고 기지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다 죽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내가 빠지면 우리 대장님은 10시간이고, 20시간이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생명선을 끊지 않을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야 해요. 그게 리더예요. 그래야 모든 조직이 무너지는 위기의 순간에서도 우리 조직만은 끝까지 살아남아 혁신의 길, 창조의 길로 나아갈 수 있어요.

2.
일요일 아침 이런 글을 트윗하였습니다.

생각하는 정원 성범영원장. “창의성도 오랜 공부와 관찰에서 나오는 거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건가? 시련과 아픔의 시간을 견뎌야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점에서 분재와 같다. 부러진 가지는 마디를 만들고 표피에는 그 연륜이 밴다.”

성범영원장의 인터뷰중 일 부분입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 자연 그대로 둬도 아름다운 나무에 잔인한 짓을 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무식한 소리다. 분재에 감아놓은 철사를 두고 하는 얘기인가 본데, 수형을 교정하는 데 잠시 사용할 뿐이지 그것이 식물을 죽이는 건 아니다. 고통 없이 인격을?수양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분재가 잔인한 짓이라면, 왜 분재 나무의 수명이 그토록 길겠는가. 햇빛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게 뿌리를 잘라주고 잎을 솎아주는 게 분재다. 좁은 공간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하며 더욱 강해지는 게 분재다.”

– 자서전 ‘생각하는 정원'(김영사)에 보니, 분재를 어린아이 키우시는 일에 비유하셨더라.
“시련과 아픔의 시간을 견뎌야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점에서 분재와 같다. 부러진 가지는 마디를 만들고 표피에는 그 연륜이 밴다. 많은 고통과 싸워 살아남은 나무일수록 수형이 격을 갖춘다. 시련을 겪으며 끊임없이 경쟁력을 높인 사람이 성공하지 않던가.”

– 자율·창의성을 강조하는 21세기식 교육에서는 구식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저렇게 안하무인 키워내는 교육이 된 거다. 국가관도 없고, 부모와 사회 어른들에 대한 존경심도 없고. 창의성도 오랜 공부와 관찰에서 나오는 거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건가? 한심하다.”

항상 조선일보에 실린 글을 읽을 때는 집중합니다. 공감가는 글이지만 무언가를 또다른 메시지를 전하려 하기때문입니다. 앞서 인용한 문장도 그렇습니다. “자율·창의성을 강조하는 21세기식 교육에서는 구식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말이다.”는 질문은 보수와 진보가 교육을 바라보는 차이를 드러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입니다.

열정과 도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을 하지만 현실은 고통입니다. 고통을 싸워야 하는 것도 또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열정을 따르라’, ‘스스로의 길을 가라’, ‘꿈을 쫒으라’, ‘너 자신을 찾아라’ 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특히 새롭게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졸업생들이나 스타트업을 준비하는 예비기업가들에게 많이 합니다. 오랜 시간동안의 고통과 인내가 없으면 성취도 없습니다.

– 돈이 생길 때마다 제주는 물론 전국에서 나무를 구해와 심었다더라. 돌 자갈밭이었던 땅에서 나무들이 뜻대로 자라주었을 것 같지 않다.
“92년 개원할 때까지 숱한 나무들이 죽어나갔지. 나무마다 성향이 다르니 키우는 방법도 달랐고, 특히나 분재는 철사 걸이부터 가지치기, 물과 거름 주기, 병충해 예방까지 하루 15시간을 일해도 모자랐다. 한여름에는 잠시 한눈만 팔아도 땡볕에 잎이 타들어갔고, 나무에 물 주는 시간만 5~6시간이 걸렸다.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지. 정원 일은 물론 인부들 밥 세끼에 새참 두끼까지 해 날랐고, 생업으로 돼지까지 키웠으니. 얼마나 힘들었으면 ‘오늘, 살 수 있는 힘을 주세요’가 아내의 기도였다.”

창의성도 역시 성범영원장님 말씀처럼 오랜 노력의 산물입니다.

– 나무 전문가들은 소나무·주목·향나무를 으뜸으로 친다지만 문외한 눈에는 꽃을 피우는 나무가 예뻐 보인다.
“꽃은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하려고 피는 것이 아니다. 눈물겨운 생존의 몸부림이다. 1월에 화사한 꽃을 피우는 능수매화나무를 봐라. 새가지가 난 자리마다 쭈글쭈글하게 주름이 이어져 있다. 꽃 한송이, 새 잎을 피우기 위해 온몸의 엑기스를 뽑아 올린다. 우리들 인생의 파노라마와 같지 않은가.”

작든 크든 오랜기간 한 길을 걸어온 분들은 나름의 인생철학이 있습니다.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몸과 마음에 밴 철학입니다. 주목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인생론입니다. “천천히, 꾸준히” 62년부터 현재까지 ‘생각하는 정원’을 일구어 가시는 성범영원장님이 꼭 주목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 아드님은 제주도 도목인 ‘담팔수’ 얘기를 들려주더라. 매일같이 버리고, 그래서 건강한 나무라면서.
“담팔수 밑에 떨어진 낙엽을 청소하려면 보통 20분은 머물러야 한다. 크고 싱싱한 배를 얻으려면 봄에 열매가 콩알만큼 자랐을 때 미련없이 따줘야 한다. 나무도, 사람도 욕심을 버려야 산다. 물이 순환해야 썩지 않는 것처럼.”

-나무마다 인간사에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이라는 ‘주목’이 오래 사는 비결을 아는가. 일반 나무들은 줄기가 크면 뿌리도 크지만, 주목은 줄기가 커도 뿌리 끝은 실뿌리처럼 가늘다. 그래서 물을 흡수하는 양이 적고 강한 햇빛을 싫어하는 편이라 성장이 늦다. 이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요소를 동원해 활력소를 만들며 천천히 생존한다. 성장이 늦는 대신 기초를 단단히 다져 오래간다. 빨리 성장하는 것은 그만큼 무너지기 쉽다.”

Leave a Comment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