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의 인생

1.
소설가 최인호. 선생님의 수 많은 소설중 제가 읽은 것은 딸랑 한권, ‘상도’입니다.

그 분을 다시 뵌 것은 봉사를 다니는 병원 미사때입니다. 저는 수원교구이고 병원은 서울교구입니다. 그래서 읽는 주보가 다릅니다. 서울대교구 주보 ‘말씀의 이삭’에서 최인호 선생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투병속에서 깊어진 묵상이 짧은 단편속의 뛰어난 문장으로 전해집니다. 감동이었습니다.

이 때 읽었던 글이 ‘겨자씨의 비밀’입니다.

겨자씨의 비밀을 발견한 것은 최근에 우연히 「성녀 소화 데레사 자서전」을 다시 읽은 후였습니다.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있는 책은 읽을 때마다 감동을 불러일으키는지 지금껏 수차례 읽었음에도 새로운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소화 데레사는 널리 알려진 데로 15살에 가르멜수도회에 들어가 24살에 선종함으로써 10년도 못 되는 짧은 수도원생활을 한 새내기 성녀입니다. 수많은 성인들이 대부분 그러하였듯이 위대한 업적을 남기거나 새로운 수도회를 창립하거나 순교를 하거나 성덕을 이루기 위해서 초인적인 신앙을 증거한 것이 아니라 봉쇄수도원에서 기도를 하고, 마룻바닥을 닦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것과 같은 평범한 일상생활에 전념하였던 수도자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성녀가 되기를 꿈꾸었던 데레사는 ‘구름을 찌르는 높은 산’과 같은 성인들에게 비하면 사람들의 발아래 짓밟히는 ‘작은 모래알’과 같은 자신의 무능함에 절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데레사는 ‘하느님께서는 이루지 못할 원을 내게 일으키게 하진 못하실 것이다.’라고 마음을 굳게 먹고 그 길을 가리켜달라고 기도하고 성서를 찾아보았을 때 이 구절이 눈에 띄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서에는 ‘누가 만일 아주 작은 자이거든 내게로 오라’ (잠언 9,4)고 하시는 ‘영원한 지혜’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있었습니다.”

성녀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순수한 사랑에서 나오는 아주 작은 행동이 하느님의 눈에 가장 가치 있는 일이며, 다른 사업을 모두 한데 모은 것보다도 교회에 유익하다.” (영혼의 노래)라는 말에 용기를 얻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작은 일’이야말로 자신이 해야 할 일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아주 소소하고 그러니까 마룻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바늘 하나를 주을 때에도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주우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영혼 하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당신의 사랑을 증거하는데 조그만 희생하나 눈길 한 가닥,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아주 작은 것도 이용하고 그것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성인의 길’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녀 소화 데레사가 발견한 ‘겨자씨’의 비밀이었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은 베드로의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자기도 모르고 한 말’(루카 9,33)처럼 ‘스스로 나팔 부는 위선’(마태6,2 참조)이거나 ‘되풀이 되는 빈말’(마태 6,7 참조)일 때가 많습니다. 이런 애매한 믿음이야말로 주님께서 꾸짖는 ‘약한 믿음’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신 것은 46년이나 걸린 솔로몬의 거대한 성전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성전)을 아끼는 사랑의 열정’(요한 2,17 참조)입니다. 주님은 심지어 돈과 권력과 궤변으로 얼룩진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다시 세우겠다.’라고 질타하지 않습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은 우리들의 수도원인 가정 속에서부터 타올라야 합니다. 우리들의 가정은 평화로운 곳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기 위해 겨자씨와 같은 작은 희생과 헌신과 양보와 인내들이 불꽃처럼 부딪치는 올코트 프레싱의 격전장입니다. 소화 데레사는 이 ‘작은 길’을 끝까지 달려가 작은 모래알이 되어 자신이 원했던 데로 ‘목숨이 다하는 날 빈손으로 주님께 나아감’으로서 우리들에게 ‘장미의 꽃비’를 뿌리는 가톨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소화 데레사는 말했습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길은 이 층에 간 어머니를 찾아우는 아기처럼 하면 된다.’

우는 아기 데레사가 성녀가 되었다면 감히 우리도 성덕을 향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음식을 만들 때도 데레사처럼 사랑으로 하고, 자식들을 아기 예수처럼 대하고, 아내를 성모님처럼 공경하고, 남편을 주님을 대하듯 사랑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면, 우리의 가정은 성가정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만권을 읽은 책의 내용이 겨자씨와 같은 이발(李勃)의 머릿속에 깃들 수 있듯이 이러한 겨자씨의 믿음이야말로 수미산을 움직이고, 새들이 날아와 둥지를 틀 수 있는 거대한 숲을 이루는 하늘나라 의 열쇠인 것입니다.

때 마침 주보에 실렸던 글을 묶어서 펴낸 ‘최인호의 인생’이 나왔습니다. 어느 날, 최인호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도서관에서 마지막 묵상집을 빌려 읽었습니다. 앞서 읽었던 ‘겨자씨의 비밀’중 1에 해당하는 글이 있더군요. 책은 1,2를 묶어서 하나의 장으로 했습니다.

불교의 경전인 ‘유마경’에는 수수께끼와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겨자(芥)씨 속에 수미산이 들어있다.”

수미산(須彌山)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나오는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산으로 해와 달은 수미산의 허리를 돈다고 알려진 상상 속의 성산입니다. 겨자씨는 티끌이나 먼지와 같은 극히 작은 물질을 상징하는 씨앗인데 그 속에 해와 달이 산허리를 돌만큼의 거대한 수미산이 깃들어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모순입니다. 이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던 당나라의 학자 이발(李勃)은 지상(智常)스님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스님, 유마경에 이르기를 ‘수미산이 겨자씨 속에 들어있다.’ 하였는데 어찌 그런 큰 산이 작디작은 겨자씨 속에 들 수 있습니까.”

이발은 평소 독서를 즐겨 독파한 책이 만권이 넘어서 자 사람들이 ‘이만 권’이라 칭하였던 당대의 대학자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지상스님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이발아, 사람들은 너를 ‘이만 권’이라고 부르지 않더냐. 그러하면 너는 만권의 책 내용을 어떻게 겨자씨와 다름없는 작은 머릿속에 넣을 수가 있었느냐.”

지상스님의 선답은 알듯 말듯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더욱 알쏭달쏭합니다. 주님도 같은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수수께끼와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마태 17,20)

겨자씨는 주님께서 말씀하셨듯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마태 13,32) 이지만 이 작은 믿음만 있다면 주님은 우리가 산을 움직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루카 17,6) 라고 못 박고 계신 것입니다. 제가 가톨릭에 귀의한 것이 올해로 25년. 그동안 이 구절은 당대의 학자 이발처럼 항상 저에게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습니다.

우선 주님의 이 말씀을 떠올리면 저는 기가 죽습니다. 저는 믿음이 부족한 열등한 신자임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신부님이 열성적인 신자와 내기를 했습니다. 만약 그 신자가 ‘주의 기도’를 처음부터 끝까지 잡념 없이 그 뜻을 새기며 외울 수만 있다면 만 원을 주겠다고 말입니다. 신자는 자신 있다고 대답하고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한참을 기도하다가 갑자기 눈을 뜨고 물었습니다.

“신부님, 성공하면 얼마라고 하셨죠. 만 원이었던가요.오천 원이었던가요.”

이 우스개 속의 주인공이 바로 저입니다. ‘주의 기도’의 짧은 기도문도 저는 1%의 잡념 없이 끝까지 완벽하게 집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주님을 향한 제 믿음이 겨자씨 하나만큼 작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 말씀인가요. 물론 저는 이 산을 저쪽으로 옮기거나 바다 속에 뽕나무를 심을 만큼의 큰 소망을 바라지는 않지만, 주님을 향한 믿음이 겨자씨 한 개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참을 수 없는 슬픔이었습니다.

주일마다 빠지지 않고 미사에 참여하고, 묵주기도를 하고, 식사할 때마다 성호를 긋고, 가끔 주님이 주시는 위로에 눈물 흘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용솟음쳐도 주님을 향한 제 짝사랑이 겨자씨보다도 작다면 제가 주님을 배신한 가롯 유다와 무에 다를 게 있겠습니까. 가톨릭에 귀의하고 25년 동안 줄곧 마음속에 품어왔던 겨자씨의 비밀이 제 마음속에서 밝혀진 것은 극히 최근의 일입니다. 겨자씨의 비밀이야말로 ‘싹이 트고 자라나면 어느 푸성귀보다도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날아 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마태 13,32)로 자라는 하늘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2.
책은 릴케의 ‘엄숙한 시간’을 인용한 묵상글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로 시작합니다.

오랜만에 ‘말씀의 이삭’란을 통해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미 두 차례에 걸쳐 매주 여러분을 만났습니다만 마지막으로 썼던 것이 1999년이니 벌써 13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저는 잘 알고 계시겠지만,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저는 몸이 건강하여 불의의 교통사고로 짧게 병상에 누웠던 적은 있어도 병에 걸려 입원 생활을 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병원은 저와 상관없는 별도의 공간이며 운이 나쁜 사람들이나 가는 격리된 수용소와 같은 곳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던 제가 어느새 5년째 투병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란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금언을 새삼스럽게 실감하게 된 요즈음입니다.

2008년 여름, 저는 드디어 ‘내 차례’를 맞아 암이라는 병을 선고받고
가톨릭 신자로서 앓고,
가톨릭 신자로서 절망하고,
가톨릭 신자로서 기도하고,
가톨릭 신자로서 희망을 갖는 혹독한 할례식을 치렀습니다.

저는 이 할례식을 ‘고통의 축제’라고 명명하였으며 앞으로 한 달 동안 ‘말씀의 이삭’란을 통해 아직도 출구가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고통의 피정 기간 동안 느꼈던 기쁨을 여러분에게 전하고 주보의 지붕 위로 올라가 외치려고 합니다.

저는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불어 닥친 이 태풍은 다름 아닌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바오로가 말한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신성 모독의 죄를 범하는 것으로 ‘여러분 중에 몸이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죽은 자가 적지 않은 것은 그 때문(1코린 11,30)’이라는 말씀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저에게 있어 암의 선고는 미국작가 N.호손이 쓴 간통한 죄로 ‘A’란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기고 사는 여주인공의 낙인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병원 복도에서 마주친 머리를 깎은 천사와 같은 어린 환자의 눈빛을 보았을 때 나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면서 절규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저 아이는 누구의 죄 때문에 아픈 것입니까. 자기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그때 주님은 제 귓가에 속삭이셨습니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아이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요한 9,3)’

그 순간 저는 비로소 죄의식에서 해방될 수 있었으며 병원 안에 있는 수많은 환자들, 아아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가정 속에서 소중한 우리의 아빠, 엄마, 딸, 아들, 이제 갓 태어난 아기들이 온갖 병으로 스러지고, 신음하고,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은 모두 죄인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놀라운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진리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독일의 시인 릴케는 「엄숙한 시간」에서 노래했습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세상 속에서 까닭없이 울고 있는 사람은 나를 위해 울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밤중에 어디선가 누군가 웃고 있다.
한밤중에 까닭없이 웃고 있는 사람은 나를 두고 웃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걸어가고 있다.
까닭없이 걸어가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향해 오는 것이다.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죽어가고 있다.
세상 속에서 까닭 없이 죽어가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우리들이 이 순간 행복하게 웃고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의 눈물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건강한 것은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 덕분입니다.
우리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은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굶주리는 사람들의 희생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울부짖고 있는 사람과 주리고 목마른 사람과 아픈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울고, 내가 굶주리고, 내가 슬퍼하고, 내가 병으로 십자가를 지고 신음하면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바로 우리 곁에서 이렇게 위로하고 계십니다.

“슬퍼하지 마라. 기뻐하고 즐거워 하여라. 하늘나라가 너의 것이다.”

다음은 ‘벼랑 끝으로 오라’입니다. 중국 선사 석상의 일화는 ‘길 없는 길’ 1권에도 등장합니다.

옛 중국의 선사 석상(石霜)은 어느 날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백 척이나 높은 작대기 끝에서 어떻게 하면 걸을 수가 있겠는가.”

제자들이 대답하지 못하자 스스로 대답했습니다.

“백척이나 높은 작대기에 올라가 능히 앉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해도 진리에 이른 것은 아니다. 백척간두에서 다시 한 발자국 나가보라. 그렇게 되면 시방세계의 모든 진리를 보게 되리라.”

제가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육체의 고통보다 더 힘든 것은 끊임없는 걱정과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루 24시간 매 순간이 마음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문득 억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죽고 사는 백 척 작대기 위에 앉아 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걱정과 두려움에 떨고만 있어서는 되겠는가.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 처럼 괴롭히는가. 죽음에 대한 공포도, 온갖 걱정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길한 망상 때문인데 어째서 일어나지도 않은 현상을 미리 가불해서 앞당겨 근심하고 있단 말인가. 저는 몇 날 며칠을 제 불안에 대한 정체를 직시해 보려 했습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매 순간 단순하게 살지 않는다면 인내심을 갖기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과거를 잊고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합니다. 우리가 실망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곰곰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조용히 쉬지 않고 안달하면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습니다.”

우리들의 불안과 두려움은 소화 데레사의 말처럼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 때문입니다. 과거의 마음을 얻으려 한다면 집착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며, 미래의 마음을 얻으려 한다면 욕망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현재의 마음을 얻으려 한다면 사리분별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불교의 골수인 금강경에는 이런 명구가 나옵니다.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선승 황벽(黃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는 감이 없고,
현재는 머무름이 없고,
미래는 옴이 없다.
(前際無去今際無住 後際無來)”

주님도 이에 대해 분명하게 못 박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마태 6,34)

제가 내일을 걱정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빵을 달라는데, 돌을 주시겠습니까. 아들인 제가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시겠습니까. 제가 두려워한다는 것은 아버지를 믿기보다 저 자신의 의지와 능력을 더 믿어 교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들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고 계신 아버지께서 제 날개를 꺾어 땅에 떨어뜨리겠습니까.

백척간두에서 유일하게 사는 방법은 한 발자국 더 나가는 일이며, 성난 파도를 잠재우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치마를 뒤집어쓰고 인당수의 깊은 바다에 몸을 던지는 길입니다.

프랑스의 시인 아폴리네르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 벼랑 끝으로 오라. / 그들이 대답했다. / 우린 두렵습니다. / 그가 다시 말했다. / 벼랑 끝으로 오라. / 그들이 왔다. / 그는 그들을 밀어버렸다. / 그
리하여 그들은 날았다.”

과거를 걱정하고 내일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벼랑 끝으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날개를 가진 거룩한 천사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최인호 선생님이 인생을 되돌아 보는 세가지 키워드를 느낄 수 있습니다. 문학, 불교, 천주교입니다. 최인호의 인생을 보면 불가의 선승들의 일화가 자주 등장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칼, 살리는 칼’도 불교 선승인 남전과 조주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서슬이 퍼런 스승의 선기에 압도되어 버린 대중들은 입조차 달싹 못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 남전은 그 자리에서 고양이의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외출에서 돌아온 제자 조주(趙州)가 인사하러 왔을 때, 남전은 낮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네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조주는 말없이 자신이 신던 짚신 한 짝을 머리 위에 얹고 걸어 나갔습니다. 이에 스승 남전이 혀를 차며 말하였습니다.
“네가 있었더라면 고양이는 살 수 있었을 터인데.”그 이후부터 ‘불살생’의 계율을 파계하여 고양이의 목을 벤 남전의 칼은 애욕을 끊기 위한 ‘사람을 죽이는 칼(殺人刀)’이며, 그것이 분쟁의 원인인 고양이라 할지라도 하찮은 짚신조차 머리 위에 떠받드는 것처럼 섬기겠다는 조주의 칼은 ‘사람을 살리는 칼(活人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근세의 선승 혜월(彗月)은 1937년 죽기 전 선암사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천하의 명검’이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헌병대장이 보고 싶은 욕망에 절을 찾아왔습니다. “그 칼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라는 간청에 “물론입니다.” 하고 앞장서 걷던 혜월은 느닷없이 뺨을 후려쳐 헌병대장을 섬돌 아래로 떨어뜨렸습니다. 졸지에 수모를 당한 헌병대장이 허리에 찬 칼을 빼려 하자 혜월이 먼저 다가가 그를 부축하여 일으키면서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내가 갖고 있는 천하의 명검이요. 내가 때려 섬돌 아래로 떨어뜨린 손은 사람을 죽이는 칼이며, 부축하여 일으켜 세운 손은 사람을 살리는 칼입니다.”

길고 긴 투병생활이 시작되었을 때, 저는 의사처럼 소중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도“의사를 존경하여라. 너를 돌봐 주는 사람이요, 또한 주님께서 내린 사람”(집회서 38,1)이다. “그들은 그들대로 주님께 기도를 올려 환자의 고통을 덜고 병을 고치는 은총을 빈다. 그렇게 하여 환자의 생명을 건지는 것이다.”(집회서38,14)라며 의사들을 「주님께서 내린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2010년 3월 저는 두 번째로 방사선치료를 하게 됐을 때 화학치료를 병행할 것인가에 대해서 어떤 의사와 상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의사는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올가을까지만 사신다 생각하시고 마음 준비를 하시지요.”이른바 시한부 선고였습니다. 젊은 의사는 과학적 의술에 의한 임상학적 판단으로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그 의사가 측은하게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의사는 제 생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을 끊어버림으로써 고양이의 목을 베었는지는 모르지만 ‘고양이로서의 환자(?)인 저’는 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의사가 하느님을 믿든 안 믿든 그의 의술은 ‘왕(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예물’(집회서 38,2)이며, 생명은 그가 다루는 지식이 아닌 하느님의 신비한 섭리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하찮은 짚신까지도 머리 위에 섬기듯 환자를 사랑하고 아끼며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은 병든 부위를 도려내는 수술 칼로 사람을 살리는 칼을 쓰는 성직자입니다. 따라서 의사는 환자들을 희망과 용기로 부축하여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이처럼 의사들만이 아닌 모든 사람이 다루는 정치, 경제, 법, 언론, 제도에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사람을 살리기도 하는 양면의 칼날이 들어 있습니다. 두 개의 칼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칼에서 비롯되며 그 칼이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주님, 제 혀와 손과 생각은 모두 양면의 날을 가진 불칼임을 제가 아나이다. 제 혀끝에서 비난과 독설, 거짓말과 고함 소리를 베어내 주시고, 제 생각에서 교만과 독선, 자애심을 끊어주시고, 제 손에 쥔 붓에서 퇴폐와 부도덕과 파괴를 유혹하는 독소를 씻어내 주소서. 그리하여 제가 최후의 만찬을 시작하기 전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고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으로 닦아주셨던’(요한 13,5)주님을 본받아 사람을 섬기는, 사람을 살리는 평화의 칼이 될 수 있도록 은총 내려주소서.

최인호 선생님이 인생에서도 밝혔지만 ‘길 없는 길’이라는 소설을 쓰시면서 불교의 선(禪)을 많이 고민하셨다고 합니다. 불교적 가톨릭 신자라고 불리우고 ‘불교에 길을 묻고 천주교에 의지한’ 작가라고 합니다. 그만큼 불가의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글들이 많습니다. 이 때문에 저도 최인호 선생님의 ‘길 없는 길’을 읽고 있습니다.

3.
진리를 향한 작가의 몸부림, 죽음을 앞둔 약한 인간의 갈망이 절실히 묻어나는 글은 다음입니다. ‘예수, 마리아밖에 모르는 성 김아가다’라는 묵상입니다.

1836년 10월, 김아기(金阿只, 아가다)는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었습니다. 미신을 믿는 남편에게 출가하였던 김아기는 신자이던 언니가 ‘그 귀신들은 모두 헛된것이니 믿지 말라’는 말에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꾸며놓았던 우상과 그림을 불태워버렸습니다. 이처럼 열성이 지극한 김아기를 언니는 영세시키려고 애를 썼으나 어찌나 머리가 둔한지 몇 해를 가도 ‘예수, 마리아’ 두 마디밖에 외우지 못했습니다. 결국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 때도 “나 같은 여편네는 예수, 마리아밖에 모릅니다.”라고 대답하여서 김아기가 감옥에 돌아오면 갇혀있던 교우들은 웃으면서 “예수, 마리아밖에 모르는 김아기가 들어온다.” 하고 맞아주었다 합니다. 마침내 3년 옥살이 끝에 옥중에서 ‘아가다’란 이름으로 대세를 받고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앞 네거리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습니다.

이로써 ‘예수, 마리아밖에 모르는 김아가다’는 우리나라가 낳은 103위 성인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하늘의 진리를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 같은 사람, 김아기에게는 나타내 보이십니다.’(마태 11,25 참조)

자신이 목수였던 예수께서는 역시 가난한 어부나 세리, 창녀와 같은 죄인을 불러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의 복음사가들도 소위 지식 있는 사람도, 똑똑한 사람도 아닌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최초의 복음서를 쓴 마르코는 사도 바오로를 따라 전도여행에 따라나섰던 사람으로 베드로에게 ‘내가 아들로 여기는 마르코’(1베드 5,13)라고 신임을 얻었습니다. 마르코는 베드로의 기억을 바탕으로 복음을 썼는데 ‘몸에 고운 삼베만을 두른 젊은이가 알몸으로 달아났다.’(마르 14,51-52 참조)는 구절은 마르코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께서 체포되던 날에 ‘나는 현장에 있었으므로 내 이야기를 믿어 달라’는 무언의 암시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마태오는 세리였으며, 루카는 바오로가 그를 ‘사랑하는 의사 루카’(콜로 4,14)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의사라는 말도있고, 성모님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였다고도 합니다.

4대 복음서 중의 하나인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은 루카가 ‘존경하는 데오필로’라는 사람에게 “이미 듣고 배우신 것들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는”(루카 1,4) 간절한 소망으로 쓴 기록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복음서를 거룩한 소명에 의해서 쓴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보고 들은 놀란 일들이 모두 ‘틀림없는 사실’이며,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20,31)

이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고 그 외아들인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심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믿는 가톨릭 신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곁에 있는 ‘데오필로’에게 이미 듣고 배운 것들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복음을 써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라고 하셨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환호하자 이를 지적하는 율법 학자들에게 “잘 들어라, 그들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루카 19,40)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입을 다문다면 돌들이 소리질러 주님을 증언할 것입니다. 성 김아가다는 오십 평생 단 두 마디의 복음서를 썼습니다. 김아가다 복음서의 제1장은 ‘예수’이며, 제2장은 ‘마리아’입니다. 주님, 저도 제가 받은 이 놀라운 은총과 생명의 신비가 땅 끝까지 퍼져 나가고 아직도 멸시받고 능욕당하는 가엾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위해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를 주소서.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가 성 김아가다처럼 ‘예수’와 ‘마리아’를 선포케 하시고 ‘제 귓가에 속삭이는 주님의 말씀을 지붕 위에서 목이 터져라 외칠 수 있도록’(마태 10,27 참조)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책중에 김수환추기경님과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긴 여행이 무엇인지 아세요?”
“모르겠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추기경님은 자신의머리와 가슴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셨다.

“바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지요. 나 역시 평생 이 짧은 것처럼 보이는 여행을 떠났지만 아직도 도착하기엔 멀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항상 자기반성과 회개를 통해 조금씩 조금씩 우리 마음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하느님께 나아가고 예수를 닮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과오가 있다 하더라도 그나마 종교인들이 소금 역할을 해줌으로써 이 나라가 굳건히 지탱될 수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 곧 ‘말과 생각과 행위의 삼위일체’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중세유럽의 대표적인 신학자로 손꼽히는 성인 중의 한사람입니다. 그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세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원래는 하나의 몸이라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인 ‘삼위일체(三位一體)’에 깊은 관심을 갖고 그 신비를 밝히려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해변을 산책하다가 한 어린이가 모랫구멍에서 조개껍데기로 물을 푸는 모습을 보고 성인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자 어린이는 ‘바닷물을 퍼 올리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바닷물을 퍼서 뭘 하려 하는데.’ 하고 다시 묻자 어린이는 대답했습니다. ‘바닷물을 퍼서 바다를텅 비게 하려고요.’

어린이의 대답에서 성인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밝히는 것은 조개껍데기로 물을 퍼서 바다를 비우려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물론 성인의 말씀처럼 삼위일체의 신비를 밝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 숨겨진 의미를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태어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습니다.’(창세 1,26.27) 하느님께서는 유일무이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하신 것은 사람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이신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된 것이 분명한 진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요한 1,1)라는 요한의 증언처럼 전능하신 ‘말씀’으로서의 하느님과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사시다가’(요한1,14)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행동’과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해 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주실 것이다.”(요한 16,13)라는 성령으로의 ‘생각’이 깃들어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성삼위(聖三位)이시라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 인간들은 ‘말과 행동과생각’의 집합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처음 하느님이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을 때는 말과 행동과 생각이 일치된 완전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아담이 원죄를 지어 동산으로부터 추방된 이후 인간의 역사는 살인, 음란, 우상숭배, 도둑질, 파괴 등 각종 범죄로 얼룩지게 되었으며 일치되었던 사람의 말과 생각과 행동은 점점 분열되고 유리되어 참인간으로서 원형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한 분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우리가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니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필립 3,13-14)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바오로는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필립 3,12)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붙드신 목적은 제가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향해 달음질치게 하려는 것임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안에 있는 하느님으로서의 ‘말씀(言)’ 능력과 예수님으로서의 ‘행동(行)’ 능력과 성령으로서의 ‘생각(知)’ 능력 즉, 「지언행(知言行)」을 일치시키려 노력하는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렌즈로 햇볕을 모아 초점(焦點)을 맞추면 불꽃이 일어나 종이를 태울 수 있듯이 분열된 제 생각과 말과 행위를 오직 ‘사랑’의 초점으로 집중되어 불타오르게 하소서. 저의 말이 곧 저의 생각이며, 저의 생각이 곧 저의 행동이며, 저의 행동이 저의 말임에 추호도 어긋남이 없이 오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서 달려갈 수 있도록 주님 제 영혼을 받아주소서. 아멘.

4.
최인호 선생님은 ‘값없는 두메꽃처럼 살고 싶어라’에서 최민순 신부님의 두메꽃이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 님만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 숨어서 피고 싶어라.”

이 시를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묵상을 합니다.

지금껏 제가 살아온 인생은 ‘두메꽃’과는 정 반대의 삶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외딸고 높은산 골짜구니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로 들끓는 도시의 광장이었습니다. 저는 어떻게든 벌에게 인정받고 나비에게 돋보이려고 기를쓰고 있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집중되는 스포트라이트가 조금이라도 빗겨가면 악착같이 그 화제의 중심에 다시 서려 하였으며, 매스컴에 이름이 끊임없이 호출되어야만 출석부를 체크한 학생처럼 마음이 놓였고, 항상 저에 대한 평가에 귀를 기울이고, 온갖 찬탄과 박수소리, 선망의 시선에서 멀어진다 싶으면 불안하고 소외감을 느꼈던 전형적인 속물적인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세속적인 성공은 거둬서 한때 ‘성공시대’란 프로그램에서 출연요청을 받기도 했으며, 지금은 암과의 투병이 뉴스적 밸류(?)를 더 상승시켰는지 특집프로그램 같은 데서 집요한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40일간 단식하셨을 때 악마가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잠깐 사이에 세상의 모든 왕국을 보여주며 “저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루카 4,6)라고 유혹합니다. 악마는 ‘저 화려한 권력과 명예는 자기가 받은 것’이라고 단언하고 ‘만일 내 앞에 엎드려 절만 하면 모두가 당신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요.’라고 약속합니다. 그렇게 보면 제가 얻은 세속의 명예와 화려한 영광은 악마에게 끊임없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했던 우상 숭배의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부유하고 세속적인 권력과 육체적인욕망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몸짱에 대한 열망, 병적인 성형중독, 미모지상주의, 출세, 타인을 지배하는 힘, 명품, 쾌락, 낙태, 지나친 건강의 추구, 웰빙, 독점적 권력, 식탐, 극단적 이기주의, 중독(거짓말, 섹스, 약물, 알코올), 악의, 탐욕과 교만,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옷, 미신 등…

이 모든 것은 물신(物神)의 소유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편은 미워하고 다른편은 사랑하거나, 한편은 존중하고 다른 편은 업신여기게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 6,24)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진실로 하느님을 섬기는 가톨릭 신자라면 재물을 버리고 두메꽃처럼 ‘값없는 꽃’으로 살아가야할 것입니다. 햇님(하느님)만 보신다면야 숨어서 핀다한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보다더 화려하고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가치관은 지상의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주님은「가난한 사람은 행복하고,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 보다 굶주린 사람이 더 행복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보다 미움 받고 쫓기고 박해 받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이 크다.(루카 6,20-26 참조)」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값없는 꽃」의 절대 가치를 선언하고 계십니다.

아아, 제 인생이 얼마 남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제라도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서 ‘두메꽃’으로 피어날 수 있도록 저로 하여금 끊임없이 ‘유혹하는 자’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라고 하시지 않았느냐?”(마태 4,10)라고 외칠 수 있도록 주여! 저에게 「빛의 갑옷(로마 13,12)」을 입혀주소서,

‘최인호의 인생’ 마지막 글은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는다’입니다. 물신숭배와 같았던 인생의 끝에서 영원하신 ‘주님’을 발견합니다.

순간 내 머릿속으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금언이 떠올랐다.

“꽃잎은 떨어지지만 꽃은 지지 않는다.”

그렇다. 꽃잎은 해마다 피고 떨어지지만 꽃은 영원히 지지 않는다. 법정이란 이름의 그대는 꽃잎처럼 떨어졌지만 하늘과 땅이 갈라질 때부터 있었던 본지풍광과 부모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그대의 진면목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중략)

나는 비틀거리며 봄빛이 가득한 언덕길을 올라갔다. 어쨌든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헛맹세에, 어느 날 봄날은 오고, 그리고 봄날은 언젠가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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