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너의 형제는 어디에 있느냐”

가톨릭에서 1월 1일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1월 1일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써 의무 축일입니다. 의무축일은 주일 외에 교회에서 규정한 대축일로 가톨릭 신도들은 미사에 참여하고 육체 노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바오로 6세 교황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1968년부터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세계 평화의 날’로 정한 이후 교회는 평화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께 평화의 선물을 청하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평화의 모후’라고 하는 부르는 가톨릭의 전통을 이해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매년 1월 1일 이전 교황께서는 세계 평화의 날 담화를 발표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담화문을 발표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올해의 세계인으로 선정한 한겨레신문은 전세계 시민 깨운 교황의 한 마디 “너의 형제는 어디에 있느냐”에서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성서> 창세기 4장9절)

해마다 새해 첫날을 가톨릭교회에선 ‘세계 평화의 날’로 기린다. 지난 12일 바티칸은 ‘2014년 평화의 메시지’를 공개했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내놓은 첫 ‘평화의 메시지’다. 9쪽 분량으로 17개의 각주까지 달려 있는 메시지에서, 교황이 <성서>의 가르침에 기대어 강조한 것은 다름 아닌 ‘우애’다.
구약의 첫권은 ‘창세기’다. 천지만물을 창조한 신이 자신의 모습을 닮은 인간을 빚었다. 그 첫 인간의 후예가 카인과 아벨이다. 형 카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해, 들판으로 데려가 죽였다. 그때 신이 묻는다.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고. 창세기의 가르침은 오늘도 여전하다. 교황은 ‘평화의 메시지’에서 “당신의 형제자매는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카인과 아벨의 사연은 우리에게 ‘우애’의 의무를 일깨워줍니다. 또한 그 의무를 저버렸을 때 만나게 될 비극도 보여줍니다. … 우리의 이기적 행동이 저 많은 전쟁과 숱한 불의의 뿌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서> 신약의 첫권, 마태오복음서 23장8절은 “너희는 모두 형제”라고 가르친다. 신 앞에서, 인류는 모두 형제자매라는 말이다. 교황은 “현재 인류가 겪고 있는 극심한 경제위기도 결국 신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멀어져 탐욕스럽게 물질만 추구한 결과”라며 “평화의 근본도,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도 ‘우애’를 재발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래는 주교회의가 번역한 2014년 제47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입니다. 영어는 Message of His Holiness Francis for the Celebration of the World Day of Peace 2014: Fraternity, the Foundation and Pathway to Peace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제47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2014년 1월 1일)

형제애, 평화의 바탕이며 평화로 가는 길

1. 세계 평화의 날에 제가 처음으로 보내는 이 담화에서, 저는 모든 사람이, 모든 개인과 민족들이 기쁨과 희망이 넘치는 삶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충만한 삶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른 이들과 우애를 나누며 그들을 적이나 경쟁 상대로 보지 않고 형제자매로 받아들여 끌어안도록 해 주는 형제애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바람을 지니고 있습니다.

형제애는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분명한 의식은 우리가 서로를 참된 형제자매로 여기고 대할 수 있게 해줍니다. 형제애가 없으면 정의로운 사회를 이룰 수도 없고, 확고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이룩할 수도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형제애를 가정에서 먼저 배웁니다. 무엇보다도 가정의 모든 구성원, 특히 아버지와 어머니의 책임 있고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통하여 형제애를 배웁니다. 가정은 모든 형제애의 원천이고 평화의 바탕이며 평화로 가는 중요한 길입니다. 가정은 그 소명에 따라 그 사랑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상호 연결과 의사소통이 점증함에 따라 우리는 여러 나라 사이에서 일치와 공동 운명체 의식을 강력하게 느끼게 됩니다. 역사의 흐름 안에서, 그리고 다양한 민족 집단과 사회와 문화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이고 돌보는 형제자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형성해야 할 소명의 씨앗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이 소명은, 우리가 다른 이들의 고통에 점차 ‘둔감해지고’ 우리 자신 안에 갇혀버리게 만드는 ‘무관심의 세계화’라는 특징을 보이는 세상에서 여전히 자주 거부되고 무시됩니다.

세계 여러 곳에서 기본 인권, 특히 생명권과 종교 자유의 권리에 대한 심각한 침해는 끝이 없어 보입니다. 다른 이들의 삶과 곤경을 무자비하게 악용하는 인신매매라는 비극적인 현상은 그러한 침해의 충격적인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무력 충돌과 더불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그에 못지않게 잔혹한 전쟁이 경제와 금융 분야에서 생명과 가정과 기업을 파괴하는 수단들을 통하여 벌어지고 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세계화는 우리를 이웃으로 만들어 주지만 형제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불평등과 빈곤과 불의의 여러 상황은 형제애가 매우 부족할 뿐 아니라 연대의 문화도 결여되어 있다는 표징이 됩니다. 만연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와 물질만능의 소비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버리는’ 사고방식을 조장합니다. 이는 사회적 유대를 약화시켜서 가장 힘없는 이들과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이들을 경멸하고 방치하도록 이끕니다. 이렇게 하여 인간의 공존은 점차 실용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으로 오로지 받으려고 주는, 단순한 ‘주고받기’(do ut des)처럼 되고 맙니다.

이와 동시에 분명히 현대의 윤리 체계는 형제애의 참다운 유대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공동의 아버지를 궁극적인 기초로 삼지 않는 형제애는 지속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참다운 형제 정신은 초월적인 부성을 전제로 하고 또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부성에 대한 인정을 바탕으로 할 때 사람들 사이의 형제애는 확고해집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창세 4,9 참조)

2. 형제애에 대한 이러한 인간의 소명을 좀 더 온전히 이해하고 또 형제애의 실현을 저해하는 장애물을 더욱 분명히 인식하며 이를 극복하는 길을 찾으려면, 그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계획을 잘 알고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는 성경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창조에 관한 성경의 이야기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부부인 아담과 하와를 공통 조상으로 삼는 후손들입니다(창세 1,26 참조). 이 부부는 카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이 첫 가정에 관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사회의 기원, 그리고 개인들과 민족들의 관계의 발전을 보게 됩니다.

아벨은 양치기이고 카인은 농부입니다. 그들의 활동과 문화가 다르고 그들이 하느님과 피조물과 맺는 관계가 다르지만 형제가 되는 것이 그들의 소명과 근본 정체성입니다.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것은 형제가 되어야 하는 그들의 소명을 근본적으로 거부한 비극적인 증거입니다. 이들에 관한 이야기(창세 4,1-16 참조)는 모든 인간에게 요구되는 과제, 곧 하나 되어 살아가며 서로를 돌보아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상기시킵니다. 카인은 가장 좋은 양을 하느님께 바친 아벨을 하느님께서 더 좋아하신다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창세 4,4-5). 그래서 카인은 질투에 눈이 멀어 아벨을 살해합니다. 이렇게 하여 카인은 아벨을 형제로 여기려고 하지 않고,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 하지도 않고, 다른 이들을 돌보고 보호할 책임을 지면서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시며 카인 자신이 저지른 짓에 책임을 지도록 하십니다. 카인은 대답합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 그러고 나서 창세기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줍니다. “카인은 주님 앞에서 물러 나왔다”(창세 4,16).

우리는 카인이 형제애의 유대를 무시하고 또 자신을 형제인 아벨과 결합시킨 친교와 호혜적 유대를 무시하도록 한 진짜 이유들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물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악과 결탁한 카인을 친히 꾸짖으시며 나무라셨습니다.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있다”(창세 4,7). 그러나 카인은 죄악에 맞서기를 거부하고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창세 4,8) 하느님의 계획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이렇게 하여 카인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형제애를 실천하라는 원초적인 소명을 저버렸습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우리가 형제애의 소명을 물려받았지만 또한 그러한 소명을 저버릴 수 있는 비극적인 능력도 지녔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수많은 전쟁과 불의의 뿌리가 되는 우리의 일상적인 이기주의적 행위에서 이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친교와 헌신을 위하여 창조된 호혜적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는 형제자매들의 손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마태 23,8)

3.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과연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심어 주신 형제애에 대한 갈망에 온전히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스스로의 힘만으로 무관심, 이기주의, 증오를 극복하고 형제자매들에게 당연한 일반적인 차이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주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답을 간추려 볼 수 있습니다.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마태 23,8-9 참조). 형제애의 기초는 하느님의 부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막연하고 역사적으로 비현실적인 유전학적 부성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하고 매우 구체적인 인격적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마태 6,25-30 참조). 그래서 이는 형제애를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부성이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일단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의 삶과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변화시켜 연대성과 참다운 나눔에 우리 자신을 열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간의 형제애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생겨납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형제애의 바탕이 되는 결정적인 ‘자리’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를 사랑하시며(필리 2,8 참조) 당신의 부활로 우리를 새로운 인류로 만들어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온전히 일치하게 하셨습니다. 이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는 우리 형제애의 소명을 온전히 실천하는 일도 담겨 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께서는 그 무엇보다 아버지를 으뜸으로 여기시며 아버지의 계획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죽음에 내어 맡기셔서 우리 모두의 궁극적이고도 새로운 원칙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의 자녀이 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알아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계약이십니다. 곧,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하고 우리가 서로 형제자매로 화해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셔서 민족들의 분열이 종식되었고, 계약의 백성과 다른 민족들 사이의 분열도 종식되었습니다. 다른 민족들은 약속의 계약에 참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에페소서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을 당신 안에서 화해시키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평화이십니다. 계약의 백성과 다른 민족들을 하나로 만드시고, 그들을 가르는 분열의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안에서 하나의 민족, 하나의 새 인간, 하나의 새로운 인류를 만드셨습니다(에페 2,14-16 참조).

그리스도의 삶을 받아들이고 그분 안에서 사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알아 뵙고 하느님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여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화해를 이룬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 모든 이의 아버지를 발견하고 그 결과 모두에게 열린 형제애의 삶을 살고자 하는 자극을 받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이들은 이방인이나 경쟁자, 심지어 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로 환대받고 사랑을 받습니다. 하느님의 가정에서는 모두 한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께 자신을 결합시키기 때문에, 곧 성자 안에서 자녀가 되기 때문에, 결코 ‘버릴 수 있는 생명’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침해할 수 없는 존엄을 누립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모든 이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 누구도 우리 형제자매에게 무관심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형제애, 평화의 바탕이며 평화로 가는 길

4. 이러한 의미에서 형제애가 평화의 바탕이며 평화로 가는 임 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의 선임자들께서 쓰신 사회 회칙들이 귀중한 도움이 됩니다. 바오로 6세의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과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사회적 관심」(Sollicitudo rei socialis)에 나오는 평화에 관한 정의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민족들의 발전」에서 우리는 민족들의 온전한 발전이 평화의 새 이름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또한 「사회적 관심」에서 평화가 연대의 열매(opus solidaritatis)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는 개인들만이 아니라 국가들 또한 형제애의 정신으로 서로 만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이 같은 호의와 우정으로써, 이같이 성스러운 마음의 결합으로써 우리는 인류 공동체의 행복한 내일을 위하여 함께 활동을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이 과제는 무엇보다 가장 혜택을 누리는 이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의 의무는 인간적이고 초자연적인 형제애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세 가지 측면으로 드러납니다. 곧, 부유한 나라들이 아직 덜 발전된 나라들을 도와야 한다는 연대의 의무, 강한 민족들과 약한 민족들 사이의 관계를 더욱 공정한 의미에서 재정립해야 한다는 사회 정의의 의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더욱 인간다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고 한 쪽의 발전이 다른 쪽의 발전에 장애가 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보편적 사랑의 의무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평화를 연대의 열매로 여긴다면, 형제애가 평화의 중요한 바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평화를 나뉠 수 없는 선익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평화가 모두의 선익이 되지 않으면 그 누구의 선익도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나은 양질의 삶과 더욱 인간답고 지속적인 발전으로서, 평화는 실제로 이룰 수 있고 또 누릴 수 있습니다. 오직 모든 사람들이 “공동선에 투신하겠다는 강력하고 항구한 결의”인 연대 의식을 가질 때에만 그러합니다. 이는 ‘사리사욕’과 ‘권력욕’에 휘둘리지 않는 것을 포함합니다. 남을 착취하는 대신 그를 위하여 기꺼이 “자기를 버리고” 우리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을 억압하는 대신 “남을 섬길”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인간이든 민족이든 국가든, 일종의 도구로 [보지 않고], 저가로 착취할 수 있는 노동력과 체력을 가진 존재로, 그리고 더 이상 효용이 없을 때에는 내버릴 것으로 보지 말고, 우리 ‘이웃’으로, ‘돕는 이’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연대는 이웃을 “나름대로 권리와 다른 이와의 근본적인 평등을 갖춘 인간”으로만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산 모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았고 성령의 항속적인 활동을 입고 있는 모상”으로서, 우리의 형제자매로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 만인의 아버지이시고 만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이며 – 그로 말미암아 ‘성자 안에 만인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 성령의 현존과 생명을 주시는 활동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우리의 세계관은 그것을 해석하는 새로운 기준을 얻게” 됩니다.

형제애, 빈곤 극복을 위한 전제 조건

5. 회칙 「진리 안의 사랑」에서, 저의 선임자께서는 민족들과 사람들 사이에 형제애의 결여가 어떻게 빈곤의 주요 원인이 되는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수많은 사회에서, 우리는 가정과 공동체의 관계가 견고하지 못하여 관계의 심각한 빈곤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유형의 궁핍과 소외와 고립,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병적인 의존이 심해지는 것을 보며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빈곤은,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형제적 관계를 재발견하고 중시할 때에만, 살아가면서 겪게 마련인 기쁨과 슬픔, 어려움과 성공을 서로 나눌 때에만 비로소 극복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한편으로는 절대 빈곤이 줄어들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적 빈곤이 심각할 정도로 증대되고 있음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같은 지역 또는 같은 역사 문화적 상황 안에 사는 사람들과 집단들 사이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형제애의 원칙을 증진하는 효과적인 정책이 필요합니다. 곧, 동등한 인간 존엄과 기본권을 지닌 사람들에게 ‘자본’, 서비스, 교육 재원, 보건과 기술을 보장하여, 누구나 자기 인생 계획을 세우고 실현할 기회를 가지며 인간으로서 온전한 발전을 이룰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또한 소득의 지나친 불균형을 완화시킬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른바 사회적 저당권(social mortgage)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사회적 저당권을 바탕으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말씀처럼, “인간은 재화를 소유할” 수 있고 소유할 필요가 있지만, “소유자는 그 재화를 자기만의 사유물이 아니라 공유물로도 여겨야 하며, 그러한 의식에서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익을 줄 수 있도록” 그 재화를 사용하여야 합니다.

끝으로, 다른 모든 것의 기초가 되어야 하는 형제애를 증진하고, 또 그렇게 하여 빈곤을 물리치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양식을 선택한 사람들의 초탈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가진 것을 나누어 다른 이들과 형제적 친교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기본입니다. 이는 청빈을 서원한 봉헌 생활자들의 경우만이 아니라 수많은 가정들과 책임감 있는 시민들의 경우도 해당됩니다. 이들은 이웃과의 형제적 관계가 가장 귀중한 재화임을 굳게 믿습니다.

경제 안에서 형제애의 재발견

6. 현대의 금융과 경제의 심각한 위기의 원인은, 한편으로는 사람이 하느님과 ‘이웃’에게서 서서히 멀어지고 물질적 부를 탐욕스럽게 추구한 데에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인 관계와 공동체 관계가 약해진 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위기는 수많은 사람들을 건전한 경제 논리를 벗어나 소비와 이득 속에서 만족과 행복과 안정을 추구하도록 부추겨 왔습니다. 1979년에 이미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현실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 위험을 지적하셨습니다. “물질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이 엄청난 진전을 가늠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지배권의 본질적인 맥들이 끊길 위험이 현실적으로 피부에 느껴집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인간이 자기의 인간성을 세계에 예속시키게 버려두거나, 공동체 생활의 조직 전체를 통해서나 생산 제도를 통해서나 사회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압력을 통해서나 여러 방도로 자신을 조종 ─ 비록 흔히는 그 조종이 직접 감지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 에 맡겨 버릴 위험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연이은 경제 위기에서 우리는 경제 개발 모델을 제때에 재고하고 생활양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위기는 사람들의 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주면서도, 예지와 절제와 정의와 용기의 사추덕을 되찾을 수 있는 은혜로운 시기가 될 수 있습니다. 사추덕은 어려운 시기들을 이겨내고 우리를 서로 묶어 주는 형제적 유대를 재발견하도록 도우며, 이와 더불어 인간은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보다 더욱 큰 그 어떤 것이 필요하며 또 이를 실현할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줍니다. 특히 사추덕은 인간 존엄을 바탕으로 사회를 건설하고 유지하려면 꼭 필요한 것입니다.

형제애가 전쟁을 없앤다

7. 지난해에도 우리의 수많은 형제자매들은 참혹한 전쟁을 계속 겪었고, 이는 형제애에 심각하고도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무수한 갈등이 전반적인 무관심 속에서 계속 생겨나고 있습니다. 무기가 초래한 공포와 파괴로 얼룩진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이에게 저는 저 자신과 온 교회가 마음으로 함께하고 있음을 분명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평화를 위한 기도를 통하여, 사람들이 잊어버린 전쟁들에서 무방비 상태로 피해를 겪은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져다주는 것이고, 상처받은 이들과 굶주린 이들, 난민들과 강제 이주민들, 그리고 공포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또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신음 소리를 책임자들에게 들려주고, 온갖 형태의 적의와 폭력, 인간 기본권의 침해를 멈추게 하고자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저는 무력을 통하여 폭력과 죽음을 확산시키는 모든 이들에게 강력히 호소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무찔러야 할 적으로 여기는 사람이 바로 여러분의 형제나 자매임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무기를 든 손을 거두십시오! 무력의 길을 포기하고 대화와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다른 이들을 만나러 가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 주위에 정의와 신뢰와 희망을 다시 세우십시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세상 사람들에게 무력 갈등은 언제나 국제적 합의를 고의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며, 심각한 분열과 함께 치유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리는 깊은 상처를 만들어 내는 것임이 자명합니다. 전쟁은 국제 사회가 자체적으로 정한 경제적 사회적 큰 목표들을 이루려는 노력을 실제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금처럼 엄청난 양의 무기들이 거래되는 한, 적대감을 부추기는 새로운 핑계 거리는 계속 찾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저는 저의 선임자들과 한 목소리로 무기 확산 금지와 모든 당사국들의 군비 축소를 호소합니다. 이는 핵무기와 화학 무기의 축소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국제 협약과 국내법만으로는, 물론 꼭 필요하고 매우 바람직한 것이기는 하지만, 무력 분쟁의 위협에서 인류를 보호하는 데에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마음의 회개가 필요합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저마다 다른 사람 안에서 자신이 보살펴야 하는 형제자매를, 모든 이를 위한 충만한 삶을 일구고자 함께 일해야 하는 형제자매를 알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종교 기관들을 포함한 시민 사회가 평화 증진을 위하여 펼치는 수많은 활동에 힘을 불어넣어 주는 정신입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이 날마다 노력하여 계속 열매를 맺고, 또 평화에 대한 권리가 인간의 기본권이자 다른 모든 권리 행사의 필수 전제 조건으로서 국제법으로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형제애를 위협하는 부패와 조직범죄

8. 형제애의 지평은 또한 모든 사람의 충만한 실현에 대한 요구와 관련됩니다.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품고 있는 정당한 포부가 좌절되거나 침해당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이 포부를 실현할 수 있다는 그들의 희망도 꺾여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만 포부가 권력의 남용과 혼돈되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서로 존중하면서(로마 12,10 참조) 경쟁하여야 합니다.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겪게 마련인 불화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형제자매이고 따라서 우리 이웃을 물리쳐야 하는 원수나 적으로 여기지 않도록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형제애는 사회적 평화를 낳습니다. 형제애가 자유와 정의 사이에, 개인적 책임과 연대 사이에, 개인의 선익과 공동선 사이에 균형을 잡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치 공동체는 투명하고 책임감 있게 이 모든 것을 증진하고자 활동하여야 합니다. 시민들은 공권력이 그들의 자유를 존중하고 그들 자신을 대표한다는 것을 자각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시민들과 제도들은 파벌의 이해에 따라 갈라지곤 합니다. 이는 그 관계를 왜곡시키고 지속적인 갈등 분위기를 조장합니다.

진정한 형제애 정신은, 자유롭고 서로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의 역량과 상충되는 개인의 이기주의를 극복합니다. 그러한 이기주의는 사회적으로 전개됩니다. 곧 이는 오늘날 만연한 부패 형태로 드러나거나, 소규모부터 세계적 규모에 이르는 조직화된 범죄 집단들을 양산합니다. 이들 집단은 법과 정의를 파괴하고 인간 존엄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합니다. 이러한 범죄 조직들은 하느님께 대한 중대한 모독이 되고,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며 피조물에 해를 끼칩니다. 무엇보다도 이 조직들이 종교적 색채를 띨 때 더욱 그러합니다.

저는 도덕률과 국법을 무시하며 이득을 챙기는 마약 밀매의 가슴 아픈 비극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천연 자원의 고갈, 환경 오염, 노동 착취의 비극을 생각합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을 빈곤으로 내모는 불법 화폐 거래와 자본 투기도 생각합니다. 날마다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매매춘을 생각합니다. 이는 특히 젊은이들에게서 미래를 앗아가 버립니다. 또한 저는 혐오스런 인신매매와 미성년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와 학대, 그리고 아직도 세계의 수많은 지역에 존재하는 끔찍한 노예제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인간 존엄을 해치는 불법적인 착취의 희생자가 되곤 하는 이민들의 비극은 자주 간과되고 있습니다. 요한 23세께서 쓰신 대로, “다만 폭력으로 유지되는 인간 사회는 비인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 자신을 성숙시키고 완성시키기 위해 어떤 자극을 주고 추진하는 대신에 실제로 인간의 자유를 억누르고 제한하는 일이 진행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회개할 수 있고 자기 삶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 저는 이것이 모든 이에게, 심지어 끔직한 범죄를 저질러 온 이들에게도 희망과 확신의 메시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죽음이 아니라 죄인이 회개하여 사는 것을 바라시기 때문입니다(에제 18,23 참조).

인간의 사회적 관계의 폭넓은 맥락에서 범죄와 형벌에 대하여 살펴볼 때, 우리는 많은 교도소의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 수감자들은 흔히 그들의 인간 존엄을 침해당하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재활에 대한 그들의 희망과 염원이 짓눌리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환경에서 대부분 조용하게 많은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모든 이가 더 많은 활동을 해 줄 것을 권고하고 장려합니다. 또한 이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용기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대하여 국가 당국도 공정하고 정당하게 지원해 주기를 희망합니다.

형제애는 자연 보전에 도움이 됩니다

9. 인류 가족은 창조주께 자연을 공동의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창조관은, 자연에서 혜택을 얻되 책임감 있게 이루어지는, 자연에 대한 개입의 정당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개입은 자연에 새겨져 있는 ‘법칙’을 인정하고 자원들을 모든 이를 위하여, 또 모든 살아있는 것과 생태계 안에서 그들의 역할이 지닌 아름다움과 목적과 유용함을 존중하는 가운데, 현명하게 사용하여야 합니다. 한 마디로, 자연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고 우리는 이를 책임 있게 관리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자연을 지배하고 소유하고 조작하고 착취하려는 탐욕과 교만에 이끌려 자연을 보존하지도 존중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자연을 우리가 미래 세대들을 포함하여 우리 형제자매들이 이용할 수 있게 돌보아야 하는 은혜로운 선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특히, 농업 분야는 인류에게 식량을 공급하고자, 천연 자원을 보호하고 가꾸는 막중한 소명을 지닌 1차 산업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세상에 굶주림이 지속되고 있다는 부끄러운 현실 속에서, 저는 여러분과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구 자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현대 사회는 생산의 측면에서 우리가 지향하여야 하는 우선 순위에 대하여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게 지구 자원을 사용하여야 하는 것은 참으로 절박한 의무입니다. 이를 위한 시도들과 가능한 해결책은 많지만 생산 증가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현재의 생산량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계속 굶주림에 시달리며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서 일구어 낸 결실을 모든 이가 누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는 더 많이 가진 자와 부스러기로 만족해야 하는 이들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것이 정의와 평등과 모든 인간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는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의 근본 원칙들 가운데 하나로서 반드시 필요한, 재화의 보편적 목적을 모든 이에게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이 원칙을 존중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필요로 하고 가질 권리가 있는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재화에 효과적이고 공정하게 접근할 수 있게 돕는 근본 조건입니다.

결 론

10. 형제애는 발견하고 사랑하고 경험하고 선포하고 증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사랑만이 우리가 형제애를 받아들이고 온전히 체험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정치와 경제에 필요한 현실주의는, 이상도 없고 인간의 초월적 차원도 간과하는 단순한 기술적 요령으로 전락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열린 자세가 없으면, 모든 인간 활동은 피폐해지고 사람들은 착취당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열어 얻게 되는 그 폭넓은 차원으로 나아갈 때에야 비로소, 정치와 경제는 형제적 사랑의 진정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질서를 이루고 온전한 인간 발전과 평화의 효과적인 도구가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서 우리가 모두 한 몸의 지체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공동선을 위한 은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에페 4,7.25; 1코린 12,7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은총, 곧 당신 생명에 동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로써,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어 모든 이를 당신 자신에게 이끌어 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베풀어 주신 그 폭넓고 깊은 사랑에 따라, 호혜와 용서와 완전한 자기 증여를 특징으로 하는 형제 관계의 바탕이 마련된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이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요구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곧, 나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까지 포함하여 다른 이들의 고통과 희망에 언제나 귀 기울이며 공감하고, 우리의 모든 형제자매의 선익을 위하여 기꺼이 온 힘을 다해 헌신할 줄 아는 그 사랑의 힘든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를 끌어안으시고 단 한 사람도 잃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마음과 정신의 문을 열고 당신을 받아들이도록 강압하거나 강요하지 않으시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6-27). 그러므로 모든 활동은 사람들, 특히 가장 멀리 있고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한 봉사의 자세를 특징으로 하여야 합니다. 봉사는 평화를 이룩하는 형제애의 혼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님, 저희가 날마다 아드님의 성심에서 샘솟는 형제애를 깨닫고 실천하여, 소중한 이 땅에 사는 모든 이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도록 저희를 도와주소서.

바티칸에서
2013년 12월 8일

<원문 Message of His Holiness Francis for the Celebration of the World Day of Peace 2014: Fraternity, the Foundation and Pathway to Peace, 2013.12.8., 독일어, 영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참조>

1) 베네딕토 16세, 회칙 「진리 안의 사랑 」(Caritas in Veritate), 2009.6.29., 19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0(제1판 3쇄), AAS 101(2009), 654-655.
2) 프란치스코, 회칙 「신앙의 빛 」(Lumen Fidei), 2013.6.29., 54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3(1판 1쇄), AAS 105(2013), 591-592 참조.
3) 바오로 6세, 회칙 「민족들의 발전 」(Populorum progressio), 1967.3.26., 87항, 한국천주교주교중앙협의회, 『 교회와 사회』, 2003(제1판 2쇄), AAS 59 (1967), 299 참조.
4)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사회적 관심 」(Sollicitudo rei socialis), 1987.12.30., 39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0(제2판 1쇄), AAS 80 (1988), 566-568 참조.
5) 「민족들의 발전 」, 43항.
6) 「민족들의 발전 」, 44항 참조.
7) 「사회적 관심 」, 38항.
8) 「사회적 관심 」, 38-39항.
9) 「사회적 관심 」, 40항.
10) 「사회적 관심 」, 40항.
11) 「진리 안의 사랑 」, 19항 참조.
12) 『 신학대전』 II-II, q.66, a.2.
1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69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글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1(제3판 4쇄); 참조: 레오 13세, 회칙 「새로운 사태 」(Rerum Novarum), 1891.5.15., 19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1(제1판 2쇄); 요한 바오로 2세, 「사회적 관심 」, 42항;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 『 간추린 사회 교리』(Compendium of the Social Doctrine of the Church), 178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2(제2판 4쇄).
14)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인간의 구원자 」(Redemptor Hominis), 1979.3.4., 16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9(제2판 1쇄).
15) 『 간추린 사회 교리』, 159항 참조.
16) 프란치스코, 푸틴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 2013.9.4.,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2013.9.6., 1면.
17) 요한 23세, 회칙 「지상의 평화 」(Pacem in Terris), 1963.4.11., 34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3(제1판 2쇄), AAS 55(1963), 265 참조.

Leave a Comment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