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 지능과 인간 지성의 관계에 관한 공지: 옛것과 새것

1.
인공지능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에서 종교가 빠질 수 없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인간을 이렇게 바라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인간을 “영과 (영)혼과 몸”(1테살 5,23)으로 나눕니다. 영은 영혼과 구분됩니다.(367항 참조) 인간의 영과 가장 가까운 말은 마음, 혹은 심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368항 참조) 자동차로 비유하자면, 자동차는 몸이고 운전자는 영혼이며 엔진은 영(마음)입니다. 그런데 자동차의 엔진에 ‘연료’가 주입되지 않으면 운전자와 차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운전자가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연료가 없는 차는 움직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가 영혼을 따라주지 않을 때, 성령의 연료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성령이 육체의 욕구를 절제하게 만드는 힘입니다.(갈라 5,23) 성령을 통하여 영혼이 육체를 온전히 통제하는 법을 익히게 될 때 인간은 비로소 하느님 나라에 살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 잃었던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을 회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육체와 영혼으로 하나인 존재중에서

정리하면 인간을 영(靈)적 존재입니다. 영혼을 현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마땅하지 않습니다. 비슷한 용어가 아마도 마음(Mind)가 아닐까 합니다. 마음의 탄생을 두고 여러가지 이론들이 있지만 어찌되었든 물질로부터 진화한 것으로 바라봅니다. 물질로부터 나뉠 수 없습니다. 반면 영(靈)은 물질(육체)와 나눌 수 있습니다 다만 인간을 육체와 영혼의 통합체로 인식합니다. 지능은 어떨까요? 지능을 마음이 가지는 속성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가톨릭에서 지능이라는 표현보다는 이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무언가 다릅니다.

육체는 생물의 생태원리를 따라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 것이며, 영적 개체(個體)인 영혼은 육체와 합하여 인간의 인격성(인품 : Personality)을 형성하는 존재입니다.

인공지능과 관련하여 교황청 문서가 나온 때는 2025년 1월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재직하던 때입니다.

ANTIQUA ET NOVA :Note on the Relationship Between Artificial Intelligence and Human Intelligence

최초 위 문서를 접한 때는 Antiqua et Nova: AI와 인간 지능의 관계에 대한 고찰 (vatican.va)입니다.위 글을 여러분들이 DeepML등으로 번역하였는데 한국주교회의가 공식적인 번역문서를 내놓았습니다.

인공 지능과 인간 지성의 관계에 관한 공지:옛것과 새것

번역문서를 보면.

첫째 인공지능과 인간지성의 구분

3. 이 공지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인공 지능이 제기하는 인간학적 윤리적 도전들을 다룬다. 이 기술의 목표 가운데 하나가 이를 설계한 인간 지성을 모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도전들은 특히 중요한 문제들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다른 많은 발명품과는 달리 인공 지능은 인간 창의성의 결과물로 훈련될 수 있으며, 흔히 인간의 역량과 경쟁하거나 이를 뛰어넘는 수준의 속도와 기량으로 인간이 만들어 낸 것과 구별하기 어려운 글과 이미지 등 새로운 ‘인공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는 공론의 장에서 점점 커져 가는 진리의 위기에 인공 지능이 끼칠 수 있는 영향력에 관한 중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이 기술은 학습하고 자동적으로 특정 선택들을 내리도록 설계되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 개발자들이 예측하지 못한 해결 방안을 제시한다. 따라서 이는 윤리적 책임과 인간의 안전에 대한 근본적 질문들을 제기하고 사회 전체에 널리 영향을 미친다. 이 새로운 상황은 인류가 자신의 정체성과 세상 안에서의 역할에 관하여 성찰하게 한다.

6. 이를 위하여, 이 공지는 인공 지능과 인간 지성에서 지능(지성)(역자 주: 이 번역문에서는 원문 intelligence를, artificial intelligence의 경우에는 학습 능력, 통계적 추론 등을 포괄하는 인지적 능력을 반영한 ‘인공 지능’으로, human intelligence의 경우에는 더욱 고차원적이고 통찰적 사고, 가치 판단, 창의성 등 인간 정신의 특징을 반영한 ‘인간 지성’으로 번역한다.)의 개념을 구분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런 뒤에 인간 지성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이해를 고찰하며 교회의 철학적 신학적 전통에 뿌리내린 성찰의 틀을 제공한다. 끝으로 이 공지는 인공 지능의 발전과 사용이 인간 존엄성을 수호하고 인간과 사회의 온전한 발전을 증진하도록 보장하기 위한 지침을 제시한다.

둘째 이성에 대한 설명.

13. 인간이 자기성찰을 하기 시작한 이래로, ‘인간’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는 데에 정신이 핵심적인 역할을 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인간은 그 본성상 앎을 갈망한다.”15)는 점을 언급했다. 사물의 본질과 의미를 파악하는 추상화 능력을 지니는 이러한 앎은 인간을 동물의 세계와 구분한다.16) 철학자와 신학자와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지적 능력의 정확한 본질을 검토해 오면서, 인간이 세상과 그 안에서 인간의 고유한 자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대해서도 탐구해 왔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그리스도교 전통은 인간을 육신과 영혼으로 이루어진 존재로 이해하게 되었으며, 이 세상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세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7)

14. 고전 전통에서 지성의 개념은 흔히 ‘이성’(ratio)과 ‘지성’(intellectus)의 보완적인 개념을 통하여 이해되곤 한다. 이것들은 구분되는 능력들이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설명하듯 같은 지성이 작동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지성이라는 용어는 진리에 대한 내적 이해에서 비롯되는 반면, 이성이라는 용어는 탐색과 담론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18) 이렇게 간결한 설명은 인간 지성의 근본적이고 보완적인 두 가지 차원을 강조한다. 지성은 진리의 직관적인 이해, 곧 마음의 ‘눈’으로 진리를 파악하는 것으로, 이는 논증에 앞서고 논증의 기반이 된다. 이성은 참되고 올바르게 추론하는 것, 곧 판단으로 나아가는 담론적이고 분석적인 과정과 관련된다. 지성과 이성, 이 두 가지는 함께, 이해하는(intelligere) 행위 곧 “인간 본연의 고유한 활동”19)의 두 가지 측면을 형성한다.

15.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묘사하는 것은 인간을 특수한 사고방식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적 이해 능력이 인간 활동의 모든 측면을 형성하고 그 안에 스며들어 있음을 인식한다는 의미이다.20) 올바르게 사용되었든 그렇지 않든, 이러한 능력은 인간 본성의 내재적 측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성적’이라는 단어는 사실 인간 존재의 모든 능력을 포함한다. 지각하고 이해하는 능력은 물론이고, 원하고 사랑하며 선택하고 욕구하는 능력까지 포함한다. ‘이성적’이라는 용어는 또한 위에서 말한 능력과 내밀하게 결합된 모든 육체적 능력 또한 포함한다.”21) 이러한 폭넓은 관점은, 이성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 안에서 어떻게 인간의 의지와 행위 모두를 고양시키고 형성하며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통합되어 있는지를 강조한다.

셋째 지성과 지능

30. 지금까지 이루어진 논의에 비추어, 인간 지성과 현대의 인공 지능 시스템의 차이가 분명해진다. 인공 지능은 인간 지성과 관련된 일부 결과물을 모방할 수 있는 비범한 기술적 성취이지만, 그 작동은 수량 데이터와 계산 논리에 기반하여 과제를 수행하거나 목표를 달성하거나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 분석력으로 인공 지능은 다양한 분야의 데이터를 통합하고, 복잡한 시스템 모형을 만들고, 학제간 연결을 촉진하는 데에 탁월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공 지능은 “단일한 관점이나 이해관계들로만 다루어질 수 없는”64) 복잡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전문가들의 협력에 이바지할 수 있다.

31. 그러나 인공 지능이 지성의 특정 표현들을 정교화하고 지성을 모방한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인공 지능은 내재적 한계를 지우는 논리 수학적 구조에 한정되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간 지성은 몸으로 살아낸 수많은 경험으로 형성되는 인간의 신체적 심리적 성장 과정을 통틀어 유기적으로 발전한다. 첨단 인공 지능 시스템은 기계 학습과 같은 과정을 통하여 ‘학습’할 수 있지만, 이러한 종류의 훈련은 감각적 자극, 감정적 반응, 사회적 상호 작용, 그리고 각 상황의 고유한 맥락을 포함한 구체적 경험들로 형성되는 인간 지성의 발전적 성장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개인의 역사 안에서 개인들을 발전시키고 형성한다. 반면, 물리적 몸이 없는 인공 지능은 기록된 인간 경험과 지식을 포함한 광대한 데이터 세트에 기반한 계산적 추론과 학습에 의존한다.

32. 따라서 인공 지능이 인간 추론의 측면들을 모방하고 특정 과제를 놀랍도록 빠르고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하여도, 그 계산 능력은 그저 인간 정신의 광범위한 능력의 단편일 뿐이다. 예를 들어, 현재 인공 지능은 윤리적 식별이나 참된 관계를 정립하는 능력을 모방할 수 없다. 더욱이, 한 사람의 지성은 그가 개인적으로 살아 온 지적 도덕적 양성의 역사 안에 자리하고, 이 역사는 개인의 관점을 근본적으로 형성해 준다. 여기에는 삶의 신체적, 감정적, 사회적, 도덕적, 영적 차원이 포함된다. 이처럼 온전한 이해를 인공 지능은 제공할 수 없기에, 이 기술에만 의존하거나 이를 세상을 해석하는 주요 수단으로 삼는 접근 방식은 “전체에 대한 감각, 사물들의 관계에 대한 감각, 넓은 지평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게”65) 할 수 있다.

33. 인간 지성은 기능적 과제를 완수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모든 차원을 이해하고 현실에 적극 참여하는 데에 주안점을 둔다. 인간 지성은 또한 놀라운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인공 지능이 육체성과 관계성, 진리와 선에 대한 인간 마음의 개방성이 지니는 풍성함을 갖추지 못하였기에, 인공 지능의 능력이 무한해 보일지라도 현실을 파악하는 인간의 능력과는 비교할 수 없다. 질병에서, 화해의 수용에서, 단순한 일몰에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실제로 우리 인간이 하는 많은 경험은 새로운 지평을 열고, 새로운 지혜를 얻을 가능성을 준다. 오로지 데이터로만 작동하는 그 어떤 기계 장치도 이러한 경험들과 우리 삶에 존재하는 다른 수많은 경험에 필적할 수 없다.

34. 인간 지성과 인공 지능을 지나치게 동등하게 보는 것은 기능주의적 관점에 종속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는 특정 기술이나 인지적 기술적 성취나 개인적 성공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점에 기반한 개인의 타고난 존엄성에 달려 있다.66) 이러한 존엄성은 태아든, 의식이 없는 이든, 고통받는 노인이든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이들의 경우를 포함한 모든 상황에서 언제나 온전히 남아 있다.67) 이러한 존엄성은 또한 인권(특히 현재 ‘뇌 신경권’[neuro-rights]: 역주 – 뇌 신경 활동으로 생성되는 개인의 정보를 보호받을 권리- 이라고 부르는)의 전통을 뒷받침한다. 인권은 “공통된 기반을 찾기 위한 중요한 수렴점”68)이고 그러하기에 인공 지능의 책임 있는 개발과 사용을 위한 논의에서 근본적 윤리 지침으로 쓰일 수 있다.

35. 이 모든 점을 고려하였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셨듯이, 인공 지능과 관련하여 “‘지능’이라는 말의 사용 자체는 오해를 부를 수 있으며”69) 인간에게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 간과할 위험이 있다. 이에 비추어, 인공 지능은 인간 지성의 인공적 형태가 아니라 인간 지성의 산물로 여겨져야 한다.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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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 문서를 보면 이런 표현이 등장합니다.

인공 지능은 인간 창의성의 결과물로 훈련될 수 있으며

인공지능을 이야기할 때, 특히 AGI를 이야기할 때 창의성을 어떻게 이해할지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창의성을 다룬 여러가지 글중 MIT 테크놀로지 리뷰의 글을 보면 ‘창의성’이라는 단어가 현대의 산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현재와 같은 현상을 창의성 숭배 현상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무엇 하나 쉽게 합의하기 어려울 만큼 분열됐다. 하지만 이렇게 서로 인식하는 현실마저 제각각인 지금 같은 시대에도 여전히 모두가 공감하는 지극히 현대적 가치가 하나 있다. 바로 창의성이다.
우리는 창의성을 교육하고 수치화하며 타인의 창의성을 부러워한다. 동시에 창의성을 길러내고 키우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기술이 언젠가 창의적 사고를 빼앗아버리지 않을까 끊임없이 우려한다. 이러한 집착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사람들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창의성이야말로 개인의 성취, 직업적 성공, 나아가 세상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라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그동안 창의성을 중심으로 산업을 만들고, 공간을 꾸미며, 도시를 설계해 왔다. 그리고 그 안에는 ‘크리에이티브한 사람(creatives)’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계층이 생겨났다. 또 세상에는 해마다 개인의 창의성을 끌어내고, 깨우며, 향상하고, 정복하는 방법을 다룬 수천 권의 책과 기사가 쏟아져 나온다. 그렇게 어렵게 얻어낸 창의성을 어떻게 관리하고 보호할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책과 글도 셀 수 없이 많다.

사람들이 창의성에 이토록 강박감을 갖는 모습을 보면 이 개념이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 온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철학자나 예술가들이 오랜 세월 탐구하고 논쟁해 온 고전적인 주제처럼 말이다. 설득력이 있는 생각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네덜란드 델프트 공과대학교의 역사학자이자 디자인 연구자인 새뮤얼 프랭클린은 최근 출간한 저서 《창의성의 숭배(The Cult of Creativity)》에서 ‘창의성(creativity)’이라는 단어가 문자로 기록된 것은 1875년이 최초이며, 역사 속에서 ‘이제 막 태어난 수준’이라고 지적한다. 나아가 그는 ‘1950년경 이전까지 창의성이라는 주제를 직접 다룬 논문, 책, 수필, 논설, 송시, 수업, 백과사전 항목 등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덧붙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몇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과거에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던 창의성이 지금은 어떻게 모든 대화의 중심 소재가 된 것일까? 창의성이란 독창성, 영리함, 상상력, 예술성처럼 역사가 오래된 단어와 무엇이 다를까? 본질적으로는 유치원 교사부터 시장, CEO, 디자이너, 엔지니어, 사회운동가, 그리고 굶주린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창의성이라는 것이 단순히 개인적·사회적·경제적으로 좋은 덕목일 뿐 아니라,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해답이라고 믿게 된 걸까?

프랭클린은 책에서 이에 대한 단서를 제시한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창의성’이라는 개념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사회에서 등장한 ‘문화적 진통제(cultural salve)’ 같은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즉 점점 더 획일화되고 관료화되며 교외 중심으로 재편되어 가던 사회에서 사람들의 불안과 긴장을 완화해줬다는 것이다.

그는 책에서 “창의성은 대개 예술가나 천재들과 어렴풋이 연관된 특성이나 과정으로 정의되지만, 이론적으로는 분야에 상관없이 누구나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창의성 개념은 질서 속에서 개인주의를 발휘할 길을 열어주었으며, 미로와 같은 현대 기업 조직 안에서 고독한 발명가 정신을 되살리는 역할을 했다”고 썼다.
창의성은 어떻게 AI 시대의 지배적 가치가 되었나중에서

위에서 이야기한 책은 창의성에 집착하는 시대 – 창의성은 어떻게 현대사회의 중요한 가치가 되었는가으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AI를 다른 관점으로 보는 또다른 문서는 UN이 발표한 Governing AI for Humanity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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