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천은 단독과 아파트로 이루어진 작은 도시입니다. 80년대 지어진 주공아파트는 하나씩 둘식 재건축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섭니다. 단독에서 과천살이를 시작했지만 잠시 아파트에 산 때가 있었습니다. 8단지와 3단지입니다. 3단지는 재건축이 끝났고 8단치는 곧 허물어질 예정입니다. 또한 단독주택지구인 문원동, 부림동, 갈현동, 중앙동도 재개발로 아파트를 세우자고 난리입니다.
이제 아파트는 주거형태중 하나가 아닙니다. 부자이고 싶은 욕망의 상징입니다. 강남의 몇 십억, 몇 백억 아파트를 동경합니다.
2.
최초 아파트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이었던 6,70년대 아파트는 극소수만의 주거입니다. 대부분 단독주택에서 살았습니다. 아파트가 대중적인 거주형태로 막 등장하던 때 불문학자 김현이 알고 보니 아파트는 살 데가 아니더라이라는 글을 뿌리깊은 나무에 기고합니다.
아파트는 그 내부의 면적이 어떠하거나 같은 높이의 단일한 평면을 나누어 사용하게 되어 있다. 보통집, 아니 다시 내 아내의 표현을 빌면 땅집은 아무리 그 면적이 적더라도 단일한 평면을 분할하게 되어 있지 않다. 다락방이나 지하실은 거실이나 안방과 같은 높이의 평면 위에 있지 않다. 그것들은 거실이나 안방보다 높거나 낮다. 그런데 아파트는 모든 방의 높이가 같다. 다만 분할된 곳의 크기가 다를 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아파트에서의 삶은 입체감을 갖고 있지 않다. 아파트에서는 부엌이나 안방이나 화장실이나 거실이 다 같은 높이의 평면 위에 있다. 그것보다 밑에 또는 위에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아파트이다. 좀 심한 표현을 쓴다면 아파트에서는 모든 것이 평면적이다. 깊이가 없는 것이다. 사물은 아파트에서 그 부피를 잃고 평면 위에 선으로 존재하는 그림과 같이 되어 버린다. 모든 것은 한 평면 위에 나열되어 있다. 그래서 한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 아파트에는 사람이나 물건이나 다같이 자신을 숨길 데가 없다. 모든 것이 열려 있다 그러나 그 열림은 깊이 있는 열림이 아니라 표피적인 열림이다. 한눈에 드러난다는 것, 또는 한눈에 드러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깊이를 가진 인간에게는 상당한 형벌이다. 요즈음에 읽은 한 소설가의 소설 속에는, 아파트 단지에서 몸을 숨길 곳을 찾지 못한 아이들이 옥상 위의 물탱크 속에 들어가 숨음으로써 자신들을 죽음으로 이끌고 간 끔찍한 사건이 기술되어 있었다. 물탱크는 밖에서는 열 수 있으나 안에서는 열 수가 없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같은 평면 위에서 대번에 그 정체를 드러내는 사물과 인간은 두께나 깊이를 가질 수 없다. 두께나 깊이는 차원이 다른 것이 겹쳐서 생기기 때문이다.
땅집에서는 사정이 전혀 딴판이다. 땅집에서는 모든 것이 자기 나름의 두께와 깊이를 가지고 있다. 같은 물건이라도 그것이 다락방에 있을 때와 안방에 있을 때와 부엌에 있을 때는 거의 다르다. 아니 집 자체가 인간과 마찬가지의 두께와 깊이를 가지고 있다. 내가 좋아한 한 철학자는 집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인간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락방은 의식이며, 지하실은 무의식이다. 땅집의 지하실이나 다락방은 우리를 얼마나 즐겁게 해 주는 것인지. 다락방과 지하실에서는 하찮은 것들이라도 굉장한 신비를 간직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들은 쓸모가 없는, 또는 쓰임새가 줄어든 것들이어서, 쓰임새 있는 것에만 둘러싸여 살던 우리를 쓰임새의 세계에서 안 쓰임새의 세계로 인도해 간다. 화가 나서, 주의의 사람들이 미워서, 어렸을 때에 다락방이나 지하실에 혼자 들어가, 낯설지만 흥미로운 것들을 한두 시간 매만지면서 나 혼자만의 세계에 잠겨 있었을 때에 정말로 내가 얼마나 행복했던고! 화는 어느새 풀리고, 주위 사람들에 대한 증오도 사라져, 이윽고 밖으로 나와 때로는 이미 전기가 들어와 바깥은 컴컴하나 안은 눈처럼 밝은 것을 볼 때에, 때로는 황혼이 느리게 내려 모든 것이 있음과 없음의 그 미묘한 중간에 있는 것을 보고 느낄 때에 세계는 언제나 팔을 활짝 열고 나는 자기 속으로 깊숙이 이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 자란 뒤에도 다락방이나 지하실을 쓸데 없는 것들이 잔뜩 들어있는 쓰레기 창고로서가 아니라 내가 끝내 간직해야 될 신비를 담고 있는 신비로운 사물함으로 자꾸만 인식하게 된다. 나도 내가 사랑한,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그 철학자처럼 다락방과 지하실 때문에 땅집을 사랑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 지하실과 다락방말고도 내가 좋아하는 것은 한식집의 부엌이다. 내가 태어난 시골의 내 외가집 부엌은, 그 집이 제법 부유했기 때문에 꽤 넓었다. 그 부엌에는 언제나 내가 좋아하는 아낙네들이 가득차 있었고 그 부엌을 건너질러가면, 외할아버지가 친손자들에게만 주려고 외손자들에겐 접근을 막은 단감나무, 대추나무 들이 있었다. 사람이 없을 때에 그 부엌에 들어가 보면, 부엌바닥은 한없이 깊고 컴컴했고, 누룽지를 넣어둔 찬장은 한없이 높고 높았다. 그 부엌을 나는 한 달 전에 두 사람의 시인과 함께 놀러간 어떤 절에서 다시 보았다. 그때의 그 즐거움!
땅집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많은 것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에 대한 아름다운 산문을 남긴 생 떽쥐베리는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디엔가 우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과연 그렇다. 땅집이 아름다운 것은 곳곳에 우물과 같은 비밀스러운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에는 그 비밀이 있을 수가 없다. 오분 안에 찾아낼 수 없는 것은 아파트에 없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노출되어 있다. 스물두평 또는 서른두평의 평면 위에 무엇을 숨길 수가 있을 것인가. 쓰임새 있는 것만이 아파트에서는 존중을 받는다. 아파트에 쓰임새 없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값비싼 골동품뿐이다. 그 골동품들 또한 아파트에서는 얼마나 엷게 보이는지. 그것은 얼마짜리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그것의 두께로 존재하지 않는다. 두께없는 사물과 인간. 아파트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그대로 드러내고 산다. 그러나 감출 것이 없을 때에 드러낸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그러낼 수 있다는 것은 감출 수도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사람은 자기가 드러내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숨겨야 살 수 있다. 그 숨김이 불가능해질 때에 사람은 사회가 요구하는 것만을 살 수 밖에 없게 된다. 무의식은 숨김이라는 생생한 역동성을 잊고 표면과 동일시되어 메말라 버린다. 표면의 인공적인 삶만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아니 그러면 다락방이나 지하실이나 부엌이 없는 곳에서 산 사람에겐 깊이가 없단 말인가? 바다와 산만을 보고 자라나야 삶의 깊이를 깨달을 수 있단 말인가? 또 아이들은 언제나 신비덩어리가 아닌가? 아이들에게는 조약돌 하나로도 우주보다도 넓은 세계를 꿈꿀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내 아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은 나의 잘난 체하는 태도의 소산이 아닌가? 이 모든 것을 깊이 있게 생각해야 아파트에서의 나의 삶에 대한 충분한 비판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데, 그 비판을 하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어렵다. 그 생각에 깊이 잠기면 잠길수록 나는 어느 틈엔가 남도의 한 조그마한 섬의 밭에, 산에, 바다에 내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한 젊은 시인의 표현을 빌면 물소리도 들리는 것이다. 그 말을 뒤집으면 내가 두껍지 않을 때에 나는 엷게 판단한다는 것이 될지 모르겠다. 아파트에서 살면서 아파트를 비난하는 체하는 자기 모습. 나에게 칼이 있다면 그것으로 너를 치리라. 바로 나를!
경향신문이 창간 70주년 기획인 박철수의 ‘거취와 기억’은 아파트의 과거와 현재를 다룹니다. 제목만으로도 변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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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대한민국, 배타적 이익결사체 ‘아파트단지’ 공화국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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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치솟는 욕망이 버거워…‘복덕방 할아버지’는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3)둘 곳 없어 밀어낸 ‘엄마의 단지’…‘옹기종기’ 그리운 풍경
(2) 1960~1970년대 민영주택과 아파트 ‘식모방’
(1) “수도 위신 세워라” 독재가 급조한 삶터 중산층의 욕망 담은 ‘도시의 섬’이 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