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잊은 그대에게

1.
크레이그 차일드.

생소한 작가입니다. Geeknews에 올라온 글 제목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Hunting for dark nights and wishing on stars:A bike ride into the desert and an author in search of darkness.

평소 밤하늘을 자주 봅니다. 도시에서 밤은 그저 어둠입니다. 빛을 빛나게 하기 위한 장식입니다. 도시의 아름다움은 밤의 불빛으로 묘사합니다. 한강변을 따라 들어선 높은 건물들이 내뿜는 불빛, 반포대교의 빛폭토도 모두 빛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밤은 장식이 아닙니다. 인류가 하늘을 바라본 이후 오랜 동안 밤은 동경과 과학의 대상이었습니다. 밤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이 주인공입니다. 지금은 도시의 불빛으로 사라졌습니다.

아래는 크레이그 차일드의 개인홈페이지입니다. 다양한 글과 사진을 만날 수 있습니다.

House Of Rain

아래 글은 아마도 신간의 일부분으로 보입니다. 책 제목은 “Wild Dark”

마지막 해가 산등성이와 산 정상 사이로 사라지면서 10마일 길이의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분지 쪽에서는 해가 더 빨리 지고 반대편에서는 더 느리게 지기 때문에 일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 핏빛 주황색 봉우리를 바라보며 노을을 감상합니다. 하루의 끝자락 빛이 가장 높은 정상까지 올라가면 우리는 지구의 그림자 속으로 떨어집니다. 내면의 나침반이 작동하기 시작하고 어깨가 이완되면서 기본 방향이 정해지고 방향 감각으로 뇌가 따끔거립니다.

하루 종일 빗자루를 두드리느라 엉덩이가 아픕니다. 이 삽 모양의 오물 제거기가 자전거 시트 디자인으로 생각해낼 수 있는 전부인가요? 적어도 키보드에 쪼그리고 앉아 망막을 쪼개는 모니터에서 눈을 두 발짝 떼고 의자에 앉아 척추가 바닥을 향해 가라앉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기침을 내뱉으며 거미줄처럼 얽힌 몸을 털어내고, 잠에서 깬 듯 동공을 쭉 펴기 위해 이곳에 나옵니다. 이곳의 어떤 것도 우리나 자전거를 위해 설계되지 않았고, 특히 이 전선 도로와 나무가 아닌 짐승처럼 보이는 이 조슈아 나무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덜컹거리며 산산조각이 나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의 정의입니다.

제 오랜 친구 어빈 폭스-페르난데즈가 따뜻한 모자와 여러 겹의 외투를 입고 양손에 홍수 잔해와 몇 달 전에 죽은 조슈아 나무의 껍질과 엉킨 뿌리를 들고 산책을 마치고 돌아옵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반쯤 웃는 얼굴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사람입니다. “지난 홍수로 인해 수로가 모두 재편되었어요.”라고 그는 말합니다. “태울 나무가 많아요.”

이번 여행에서는 밤에만 불을 피우고 싶어서 “불은 안 된다”고 말했지만, 이미 기온이 떨어지고 있으니 불을 피워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나무와 바삭바삭한 풀 불쏘시개는 충분히 건조해서 라이터 한 번만 튕기면 불을 붙일 수 있습니다. 얼굴을 땅에 바짝 대고 몇 번의 헐떡거림으로 불을 붙이고, 우리 둘은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한 번에 하나씩 반으로 쪼갭니다. 불은 대부분의 인공 조명보다 더 붉은 파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펙트럼의 빨간색 끝은 길고 나른한 파장을 내기 때문에 캠프파이어에서 위를 올려다봐도 별을 볼 수 있습니다.

마가리타가 녹아내린 하늘을 뚫고 천천히 나옵니다. 어젯밤보다 오리온자리가 더 많이 보입니다. 사냥꾼자리는 옆으로 늘어진 허리띠 아래에서 칼집인지 뭔지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황소자리의 붉은 눈의 V자리가 빛의 늪을 뚫고 모습을 드러냅니다. 플레이아데스의 일곱 자매는 아직 세 명입니다.

북두칠성의 포인터 별을 따라 북극성을 찾기 위해 참고할 수 있는 몇 가지 별자리를 식별하는 방법을 배우면 밤하늘의 언어에 쉽게 빠져들 수 있습니다. 몇 주에 걸쳐 같은 장소에서 해가 지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보세요. 막대기를 땅에 세워놓고 그림자가 도는 모습을 관찰하세요. 우리 주위를 돌고 있는 더 큰 구체를 알아보세요.

특정 별을 집중적으로 관찰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눈에 띄는 별을 하나 골라 어디로 가는지 살펴보세요. 별의 등급, 크기, 광년 단위의 거리를 알아보세요. 인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면 이 별을 찾아보세요. 비밀을 말해 보세요. 소원을 빌어보세요. 한두 시즌 동안 사라졌다가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처음 보면 깜짝 놀라게 될 거예요. 별이 아닌 행성으로 밝혀진다면(목성과 금성이 가장 밝습니다) 며칠 밤마다 찾아서 어디로 움직이는지 살펴보세요. 그 뒤에 있는 별들과는 다른 궤도를 그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방황하는 별이라고 불렀습니다.

다른 인식 기술도 있습니다. 저도 다른 사람만큼이나 운세를 믿습니다. 물론 사람이 태어날 때 천체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중력과 빛의 등전위선이 보이지 않는 실을 뽑아내는 것과 관련이 있을 수 있고, 그래서 우리는 왜 위를 올려다보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오늘 황소자리가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의구심이 들지만, 쿠키에서 운을 점치는 것처럼 기꺼이 그 개념을 즐기고 싶습니다. 점성술은 프톨레마이오스가 보았던 것, 우리의 많은 조상들이 보았던 것, 하늘이 예쁜 그림 그 이상이라는 것을 상상력을 발휘해 보는 방법이기도 하죠. 자신이 태어난 별자리와 태어난 달이 있던 집을 아는 것은 누구나 익히 알고 있어야 하는 형식입니다. 하늘은 그 자체로 조상이며 오랫동안 우리를 지켜봐 왔기 때문에 하늘에 주목하는 것은 존경의 문제입니다.

밤하늘은 단순한 아틀라스가 아닙니다. 회전하는 로터와 보석이 있는 기계입니다. 계속 돌아가기 위해 외울 필요가 없습니다. 별이나 별자리의 이름이나 어떤 성격이 어떤 별자리에 묶여 있는지 알 필요도 없습니다. 존중은 한눈으로 올려다보고 더 큰 규모를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우리의 머리는 전날 밤보다 더 많이 기울어져 있습니다. 시야의 일반적인 면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라스베이거스 남쪽으로 향하는 헤드라이트의 강이 흐르는 4차선 도로에서 뒤로 물러나 있고, 운전자들이 우리를 전혀 보지 못한다면 눈꼬리만 깜빡이는, 잘 보이지 않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도시로 들어오는 교통량이 나가는 교통량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라스베이거스는 임계점에 다다른 게 분명합니다. 어빈은 이제 열흘 앞으로 다가온 그랑프리 대회에 30만 명의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12억 달러의 지역 경제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 번에 수십 대의 제트기가 공항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는 모습이 바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주에서 내려다보면 자동차와 비행기의 레이더에 반사되는 라스베가스는 마치 벌집처럼 빛의 덩어리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산맥의 가장자리를 휘감고 있는 바지다와 빨래터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도시를 한 눈에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안개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하늘의 4분의 3이 옅은 안개입니다. 북쪽의 마지막 4분의 3은 어둠이 스며드는 곳으로, 우리가 향하는 방향으로 우주 공간이 새어 들어옵니다.

저는 1980년대에 피닉스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데이트 상대와 함께 차를 몰고 도시에서 이 거리까지 가서 아버지 트럭의 벤치 시트에서 뜨거운 입김을 주고받곤 했어요. 하늘이 별빛으로 반짝이고 오리온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할 때 우리는 내려서 사구아로 사이를 걸었죠. 제 관찰은 일화이지만, 40년 전 비슷한 크기의 사막 대도시 외곽에서는 이 백금빛이 아닌 인공 조명이 더 관대했습니다. 이런 불빛 아래서는 앞좌석에서 앞을 볼 수 없었을 겁니다. 제 제한된 관점에서 보면 뭔가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밤하늘을 더 멀리 옮겼습니다.

불은 꺼지고 자갈과 먼지에 뒤덮여 빨래 바닥에 한 컵 반 정도의 고운 재로 타버렸습니다. 어빈은 슬리퍼를 신은 채 온몸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습니다. 바람이 멈추고 산에서 차가운 공기가 깃털도 돌릴 수 없을 정도로 느리게 흘러내립니다. 한기가 물처럼 밀려와 처음에는 무릎으로, 어깨로, 그리고 머리 위로 올라옵니다.

저는 밤하늘을 측정하기 위해 하늘의 품질을 측정하는 장치를 옷에 반사되지 않도록 공중에 손을 들고 서 있습니다. 저는 라스베가스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광휘의 여신상입니다. 은하수가 없으니 은하수의 가루가 어디로 흩어져야 하는지 알 수 있지만 공간은 텅 비어 있습니다. 수십 마일 떨어진 사막 건너편에 깜박이는 라디오 타워가 불규칙하게 깜박입니다. 중력이 약간 약해지면서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고, 아래가 아닌 위에서 새로운 힘이 느껴집니다. 15분 동안 측정한 결과 진도 18.9로, 어제의 18.7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에어락을 통과해 우주로 가는 데는 큰 무리가 없습니다. 이 측정기는 가시광선 스펙트럼에서 일부만 측정하며, 측정값에 포함된 아크 초를 이해하는 척하지는 않겠지만 숫자는 기준선을 제공합니다. 밤이 어두워질수록 숫자는 더 높아질 것이고, 내일은 사막 국립 야생동물 보호구역으로 향하면서 19를 돌파할 것입니다.

머릿속으로 거리를 다시 돌려봅니다. 계획보다 느리게 자전거를 타고 있고, 예상보다 더 밝고 예보보다 10도나 더 춥습니다. 아침에는 이 전선 도로를 벗어나 더 거친 시골을 향해 달리며 보틀 다크 스카이 스케일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몇 마일을 더 달릴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낮부터 허벅지가 화끈거리고 침낭에 들어가면 근육에 젖산이 고여 경련이 일어나지 않도록 발을 위아래로 움직입니다. 우리 캠프 위에는 커다란 조슈아 나무가 충격적인 검은 단검으로 백랍 안개를 찌르고 있습니다.

떨면서 움직이지 않고 우리 둘은 몸 주위에 따뜻한 공기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붙잡습니다. 어빈이 코를 골았다. 자전거가 세워져 있는 뾰족한 조슈아 나무 반대편에서 그의 코고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도 코를 골고 어빈도 제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2.
국내에 레이그 차일드가 쓴 번역서는 없는 듯 합니다. 유일하게 글 한편이 IPKU라는 잡지에 실렸습니다. IPMK 창간호네요.

혼자 있을 때면 모든 들숨과 날숨, 모든 움직임이 다 대화가 된다. 소용돌이치는 모든 물살이, 겹겹이 완만하게 쌓인 절벽의 층암들 하나하나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신음 비슷하게 짧고 나지막이 소리를 지른다. 만족할 때 내는 소리도 있고, 실망하거나 좌절을 느낄 때 내는 소리도 있다. 놀랄 때나 감탄할 때 내는 소리도 있다. 그리고 노에 물잠자리가 내려앉는 모습을 보거나 강물 위로 떠내려가는 비취색의 딱정벌레 껍질을 보면서 소소한 기쁨을 느낄 때 내는 소리도 있다.

어렸을 때 나는 혼자 있고 싶어 했다. 친구도 있었고, 함께 밤새워 놀기도 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곁에 아무도 없이 혼자 있는 것이었다. 학교가 파하고 난 뒤에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들판을 탐험하듯 돌아다니며 이곳저곳을 찾아내었다. 누구도 찾아내지 못했을 것 같은 나만이 아는 장소를. 그런데 다른 아이들과 함께 모험을 즐길라치면 사정이 달랐다. 그 애들은 가는 동안 내내 떠들어대거나 나더러 뭘 가져오라고 시켰다. 나는 가던 길을 계속 가고 싶은데 그만 멈추자고 하고, 내가 잠시 앉아 쉬면서 경치를 즐기고 싶으면 뭐 하냐며 잡아끄는 것이었다. 아니면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다. 버릇없음. 자아도취. 내성적 성향. 외동. 분명 나 같은 아이에 관한 많은 설명이 있을 것이다. 나는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쉬는 시간에는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는 곳을 피해 운동장 밖으로 최대한 멀리 나가곤 했다. 나는 줄지어 서 있는 울타리 아래에 구멍을 파서 장난감을 묻기도 했다. 나중에 누가 파내서 찾아내기를 바라며.

강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강을 왕복하며 배로 사람들을 태우고 내려주거나 물건을 운반해 주는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을 ‘솔로 긱스’(Solo Geeks)라고 부른다. 외로운 기인(奇人)이란 뜻이다. 아무도 없이 혼자인 사람, 혹은 아무도 없을 때 유유자적 혼자 즐기는 순간이 가장 행복할 때라는 것을 깨달음 사람이라고 표현하면 적당하겠다.

하지만 나는 은둔자가 아니다. 종종 다른 사람들과 기꺼이 어울리기도 하며 때로는 그런 어울림을 갈망하기도 한다. 나는 갈까마귀들이 부리로 서로의 깃털을 다듬어 주는 모습을 좋아한다. 사려 깊고 친밀한 접촉이 아닌가. 때로는 서로의 부리를 맞대고 있는 모습도 얼마나 보기 좋은가. 하지만 어느 그림자를 잘라내 붙여놓은 듯, 대지 위 하늘에 외로이 홀로 떠 있는 한 마리의 갈까마귀. 얼마나 멋진 존재인가?

마음속 소란스러운 웅성거림을 멈추려면 얼마나 걸릴까? 영겁의 시간? 굳이 멈추게 하려고 애쓰지 말자. 오롯이 나 자신이 되고자 이곳에 온 것이 아닌가. 하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낮의 둥근 날처럼 한 가닥 거미줄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하늘을 가로지를 때는 잠시 멈춰야 한다.

나는 유유히 몇 킬로를 더 노 저어 간다. 굴곡진 곳 안쪽의 수심이 얕은 곳에서는 속도를 늦추고, 그곳을 빠져나오면 속도를 높이면서, 유유히 흐르는 강줄기와 보조를 맞춘다. 수십 미터 높이로 세워놓은 초콜릿 조각처럼 갈라선 외딴 산과 절벽들. 강줄기가 단단한 암석 지대로 굽이굽이 흘러가면 거대한 돌기둥들이 시계가 된 듯 그 육중한 몸체들을 천천히 움직이며 하나하나 새 무대를 펼쳐놓는다. 나는 내 숨소리와 카누에 부딪혀 흩어지는 물소리, 그리고 양옆 협곡을 가득 메웠다가 떠나는 태양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사막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숨죽인 소리를.

최근 들어서야 비로소 여러 연구를 통해 고독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혜택이 무엇인지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전의 연구에서는 홀로 있음, 외로움, 고독을 구분하지 않았다. 이 말들이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1930년대에는 심리학자들이 그런 성향을 나르시시즘과 타인에 대한 적개심에 병리적으로 깊게 스며있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 성향은 ‘대인 관계 문제, 정신 분열적 경향, 또는 인간 혐오’를 나타내는 부자연스러운 상태로 여겨졌다.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사회적 연결성이 발달하고 세계적으로 인구 밀도가 낮은 곳이 감소하면서 혼자 있을 기회도 점점 줄어들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1970년에 심리학자인 에이브러햄 매슬로가 올바른 정신과 진지한 사고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하는 ‘자아실현의 개인들’이 공통적으로 사적 자유와 혼자만의 긍정적인 경험을 중요시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매슬로는 고독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병리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스스로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한 기회를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 이후, 홀로 있음을 즐기는 능력이 정신 건강 증진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연구를 통해 밝혀지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이 필요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고독은 천 번의 대화만큼이나 가치가 있고 효능이 있다는 것이다.
홀로 있음:더 큰 세상과의 만남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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