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온라인성경 이어쓰기

매년 수원교구는 성경잔치를 합니다. 여러가지 행사중 ‘온라인 성경이어쓰기’가 있습니다. 본당별로 팀을 만들어 성경잔치에 참여합니다. 과천성당도 2팀이 참여하였는데 그 중 한 팀에 참여하였습니다.참가자는 두가지 의무를 가집니다. 첫째는 당연히 성경이어쓰기. 아무때나 쓰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씁니다. 제가 맡은 시간은 새벽 4시부터 5시입니다. 둘째는 성경 묵상입니다. 필사를 하면서 혹은 읽으면서 가진 느낌을 적습니다.

아래는 성경이어쓰기 카페에 올린 글입니다. 개인적인 기록으로 옮겼습니다. 아주 사적인 기록입니다.

1.
한 달에 몇 번씩 가는 농사일. 수녀님 혼자 일하시는 농장입니다. 오늘은 새벽에 길을 나섰습니다. 한달 전 배추심었던 밭이 풀 투성입니다. 수녀님이 예초기로 미리 작업을 해놓으신 덕에 멀칭 작업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가을 바람이 불지만 낮기온이 높은 탓에 새벽공기 가르면 하는 농사일이 좋습니다.

작업하면서 밭을 보니까 말라죽은 배추와 무우가 많이 보입니다.

“사람들은 더우면 에어컨 틀고 집안에 있으면 되지만 작물은 뜨거운 열기를 그대로 받아요”
“더운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배추와 무우틀이 타버렸어요.”

소리를 내지 못한 식물이 기후위기에 견디지 못하고 사라집니다.

집회서 38장 25절.

“쟁기를 잡고 막대기를 휘두르며 소를 모는 데 여념이 없고, 송아지 이야기밖에 할 줄 모르는 농부가 어떻게 현명해질 수 있으랴?”

집회서 38장 24절을 강조하기 위하여 여러 직업들을 나열한 듯 합니다.

“학자가 지혜를 쌓으려면 여가를 가져야 한다. 사람은 하는 일이 적어야 현명해진다.”

여가가 없더라도 주님의 창조물을 통하여 주님의 이치를 깨우질 수 있습니다. 내가 사는 곳, 일하는 곳 모두 주님의 창조물이기때문입니다. 그래도 휴식이 있으면 더 좋겠죠?

2.
무언가를 하고 나니까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필사할 때보다 한시간 늦게 일어났습니다.

다시금 집회서를 폈습니다. 예전에 밑줄친 부분이 눈에 들어옵니다. 집회서 35장(공동번역)입니다.

“빈손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지 말아라.”

라고 하십니다.

“어! 재물을 항상 준비해야 하나?”

의구심을 가집니다. 다른 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곧 많은 제물을 바치는 것이며
계명을 지키는 것은 곧 평화의 제물을 바치는 것이다.
계명에 충실한 것이 구원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남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고운 밀가루 제물을 바치는 것이며
남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은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은혜를 갚는 것이 고운 곡식 제물을 바치는 것이고
악을 물리치는 것은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며
불의를 멀리하는 것은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물적인 것이 아니라 저의 삶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저를 의인이 되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저를 버린 희생 제물을 주님은 바라시는 듯 합니다.

3.
어제 버스를 타려고 동작역에서 내렸습니다.동작역은 무척이나 복잡합니다. 4호선 환승구간에 올라와 개찰구로 내려가는 동안 노 부부가 역무원에게 무언가를 물어봅니다. 역무원은 화장실로 그냥 휙 들어갑니다. 노 부부가 어쩔 줄 몰라합니다. 잠시후 역무원이 나오고 또다시 물어보는데 역무원은 4호선 탑승계단을 그냥 올라갑니다. 어디로 갈지 방황을 하십니다.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어디를 찾으세요?””현충원을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래층 개찰구로 안내하여 안내표지로 설명을 드렸습니다. 4번출구로 가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입구를 나와서 잠시 기다렸습니다. 혹시나 다른 쪽으로 가시는지 기다렸습니다. 두리번 거리시더니 4번출구 방향으로 잘 가십니다. 고개를 인사를 나누고 저의 길을 갔습니다.

구약에서 나그네는 약자를 말합니다. 또한 나그네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입니다. 창세기 18장 1,2절입니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하루중 만나는 수많은 사람중 누군가는 나그네의 모습을 하신 주님이지 않을까 합니다. 다만 제가 모를 뿐입니다.

4.
가톨릭 성경을 통독한 후 공동번역 성경으로 두번째 읽고 있습니다. 이것이 시작입니다. 이 또한 무슨 이유가 있을 듯 합니다. 레지오 주회중 앞이 아니라 뒤에서 읽어보면 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에 저도 뒤에서 읽고 있습니다. 집회서부터 계속 머리에 남은 단어가 ‘두려워하는’입니다.

예를 들어 집회서 40장 27절 말씀입니다.

“부와 권력은 마음을 들뜨게 하지만 주님을 경외함이 이 둘보다 낫다. 주님을 경외하면 부족함이 없으니 이런 경외심을 지니고 있으면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다.”

공동번역은 이렇습니다.

“재물과 힘이 있으면 자신이 생긴다. 그러나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마음을 보다 더 든든하게 한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고 다른 아무것에도 의지할 필요가 없다.”

지금도 묵상중입니다. “두려운 하느님”이 내 믿음과 삶에서 어떤 의미일지…

일상생활에서 영적인 긴장감을 가지고 살라는 뜻이 아닐지. 어떤 생각과 말과 행위가 주님의 정의과 공정인지를 항상 생각하고 살라는 뜻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5.
생각해봅니다. 복음 묵상 이어쓰기를 하지 말라..이런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묵상이어쓰기는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지혜서를 쓰지 않았지만 얼마전 공동번역으로 지혜서를 읽었습니다. 공동번역 구약의 번역이지만 생경하게 다가온 표현이 ‘두려워하는’입니다.

지혜서 15장 1절. 가톨릭 성경과 공동번역의 차이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이렇게 행하고 율법을 터득한 이는 지혜를 얻으리라.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와 같이 행하고 율법을 체득한 사람은 지혜를 얻으리라.

제가 다른 느낌을 받은 이유는 아마도 ‘경(敬)’때문일 듯 합니다.

두렵다…내가 잘못했다. 죄의식일 듯 합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그렇다는 이야기일 듯 합니다.

사랑의 하느님이 나에게 무엇을 주시길 청하기 전에 일상에서 주를 두려워하는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아니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항상 생각하는 신앙인이 되자..

이런 생각으로 구약을 읽고 있습니다..

6.
의도하지 않았지만 정해진 시간에 눈이 떠지네요. 몇 일의 습관이지만 톡방을 확인합니다. 흔적이 없습니다. 허전합니다.
시작할 때는 “어떻게 하나”하는 고민을 하였지만 이어지는 글쓰기가 힘을 주었습니다. 보통 스트레스라고 하지만 긍정적인 의미로 긴장감일 듯 합니다. 복음 묵상이어야 하지만 방송목상으로 흔적을 남길까 합니다.

어제 집안일로 일찍 운전을 하였습니다. 라디오에서 마음에 다가오는 말들이 흘러나옵니다.

“기억은 타인에 대한 주의력입니다.”
“기억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 남아야 오래갑니다.”
“기억은 사랑입니다.”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마지막 “기억은 사랑입니다.”

신앙을 가진 이후 가장 많이 생각한 단어가 ‘기억’입니다. 초기 기독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믿음은 기억에 기반합니다. 수많은 성인들과 신자들이 세상을 향해 남긴 사랑입니다. 기쁨을 함께 하는 사랑도 있지만 아픔을 함께 나누는 사랑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성경도 기억입니

어제 방송을 들으면서 다짐했습니다. “타인에 대한 주의력을 키우자, 기억하자. 그리고 실천하자..”.
복음쓰기와 선행을 함께 하라는 이유일 듯 합니다.

7.
사흗날 성경 필사. 이제는 몸이 기억합니다. 자야할 때와 깨어야 할 때를 몸이 말해줍니다.

성경필사를 하면서 의문이 듭니다. 성경필사는 노동일까? 문자를 입력하는 것으로 보면 노동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강조하면 또다른 의미를 가질 듯 합니다. 몸으로 하는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필사를 하면서 몸과 마음이 일치하면 한글 자모음소리가 규칙적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엔터키로 마무리합니다. 그런데 분심이 생기면 다릅니다. 노란색 경고등이 켜집니다. 커서키나 백스페이스키 소리가 울립니다.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실 주님은 저에게 항상 노란색 경고등을 주실 듯 합니다. 다만 제가 모를 뿐입니다. 항상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정진 또 정진해야 하고자 합니다.

8.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이지만 오늘부터 한동안 특별할 듯 합니다. 시간에 맞춰 눈을 비비고 일어나서 필사하는 모습보다는 조금이라도 일찍 일어나서 기도와 묵상으로 필사를 시작하는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좋지 않을까 합니다. 노력해야죠…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필사를 시작할 떼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시편 27:7,8

” 들으소서, 주님, 제가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자비를 베푸시어 제게 응답하소서.
내 얼굴을 찾아라.” 하신 당신을 제가 생각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습니다.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중에 말합니다.

“주님 한 말씀만 하소서”

주님은 침묵하십니다. 저의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시간으로 응답하십니다.
언제 어느 곳 어떤 모습으로 주님이 다가오실 지 알 수 없습니다.

어렵습니다.
신앙인의 삶이 쉽지않습니다.(^^)

9.
성경필사를 해본 적은 있지만 온라인 성경필사는 처음입니다. 타이핑이야 늘 하는 것이지만 필사는 다르네요. 로그온 하고 첫 글자를 입력할 때 다른 느낌인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필사하는 시간이 흐르면서 주객이 바뀐 듯 하였습니다. 필사의 목적은 쓰면서 말씀을 몸과 마음으로 받아드리는 것인데. 그저 타이핑에 집중합니다. 빨리 치려고 하다 보니까 처음에 비해 오탈자도 많아집니다. 손가락이 아니라 말씀에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필사하면서 평소에 그냥 지나갔던 문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욥기 1장 11절입니다.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 보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을 눈앞에서 저주할 것입니다”

악마의 말입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우리의 신앙은 무언가 댓가를 바랍니다. ‘기복’이라고 합니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원망합니다. 그리고 멀어집니다. ‘저주’의 또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욥기를 필사하면서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무엇인지”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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