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 기록

1.
일년에 한번 있는 서울역 송년회
어느 때부터 시내에 나오면 시청광장을 찾습니다. 이 날도 광장에 가기 위해 일찍 출발하여 회현역에 내렸습니다. 시청광장엔 아무일이 없었다는 듯 ‘스케이트장’이 개장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청사앞 놓여진 영정앞에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혼자서 특별법에 서명하고 분향하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연말연시 분위기가 도심을 덮고 있습니다. 신세계백화점앞 거리는 휘황찬란한 성탄장식을 보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시청앞 성탄트리앞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어려운 이에게 이웃이 되어준 예수님은 사라졌습니다.

2.
서울의 봄.
선택하는 자와 선택하지 못하고 눈치보는자…
각자의 선택이 어떤 역사적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 장태완을 모티브로 해서 이순신과 같은 인물을 만들려고 했다는 생각이 드는 이태신이라는 주인공.
이태신의 선택은 투쟁입니다. 반역과 혁명사이에서 모든 것을 걸고 쟁취하려는 자앞에서 싸움을 주저하는 자, 싸우려고 하는 자들중 싸우려는 자가 역사의 승리자이라고 말합니다.
주전, 주화의 갈등은 진짜 서울의 봄인 80년 5월 서울역으로 이어집니다. 투쟁파와 회군파중 회군파가 승리하고 이는 광주의 비극이 됩니다. 그리고 현재 검찰쿠데타에서도 보입니다.
한사람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없지만 변화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어느 때 정의를 위해 묵숨을 걸었던 이를 기억하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김오랑 소령..
정선엽 병장..

기억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최규하 대통령을 곱씹어보았습니다. 무능력, 무소신이라고 이야기하고 죽는 날까지 그 때의 기록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남긴 기록은 딱 하나입니다.
12.13 05:10AM
자의든 타의든 9시간을 만들었고 그 시간동안 역사의 방향을 두고 수많은 인간들이 선택을 합니다. 그래서 영화는 선택의 영화입니다.
마지막 엔딩 자막이 올라가면서 귀에 익숙한 노래가 흐릅니다. 아주 장엄한 톤으로.. 저는 개사곡으로 불렀던 군가입니다.

젊은 넋 스러져간 그때 그자리
붉은 피 흘리던날 벌써 잊었나!
학우여 들리는가! 그 성난 목소리
학우여 보이는가! 한맺힌 눈동자…

3.
넷플릭스가 추천하는 영화지만 몇 번인가 볼까 말까 망설였던 84번가의 연인. 20년동안 오직 책과 편지로만 이어지는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카톡에서 느끼지 못하는 감성입니다. 지루할 수도 있지만 따뜻하고 편지에 담긴 글이 귀에 들어옵니다. 정이 느껴지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연인 20화. 이번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편지와 모시던 분의 편지가 등장합니다. 소현세자가 장현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

“이제라도 나를 믿던 자들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
포로들을 조선으로 데려와주오…
만일 이 약조를 지키지 못한다면 나는 세자도 사내도 사람도 될 수 없어…
혹 내게 무슨 일이 생겨 내가 세자도 임금도 될 수 없다 한들 내가 인간으로는 남을 수 있도록 도와주오.”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바람. 다르게 생각하면 인간같지 인간이 많다는 뜻이겠죠.
장현의 회상에서 나오는 대사.

“예는 정에서 나온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이고 공감입니다. 공감이 없는 정치,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권력…

4.
컴퓨터를 다루는 일이 직업이 된 이후 책을 읽고 연필을 쓰는 일이 많이 줄었습니다. 더구나 나이가 들면서 책앞에 앉으면 졸기 십상입니다.
한동안 하루 분량을 정해서 책을 읽는 습관을 들인 후 많이 나아졌지만 한창때의 집중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제 시장을 본 후 우연히 집으로 오는 길에 폐기물구러미속에서 빛나는 독서대를 보았습니다. 프라스틱이나 나무도 된 작은 독서대가 있지만 무언가 부족하였는데 “좋다…”하고 냉큼 집어왔습니다.
어떤 이력인지 모르니까 깨끗이 닦고 기름칠합니다. 그리고 책상위에 올려놓고 책을 읽었습니다. 졸음이 달아나는 듯 합니다. 다른 독서대와 달리 머리를 꽂꽂하게 세워야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고개를 숙이지 않으니까 정신이 맑아지는 듯..
하루 몇 시간 도전해봅니다..

5.
이태원 참사 1주기 추모미사.
희생자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수많은 장례식장에서 바쳤던 연도가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진실로 평화와 위로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연도뒤에 함께 한 성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 “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희생자들이 기억으로 우리와 함께 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입당 성가로 부른 김민기의 ‘친구’
영성체후 부른 김민기의 ‘금관의 예수’
오랜 세월 투쟁의 현장에서 함께 했던 운동가요이지만 추모 미사 동안은 저의 마음을 주님에 전하는 성가였습니다.

“눈 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여기에 우리와 함께”

많지 않은 분들이지만 마음을 다해 희생자를 기억하고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주님.. 희생자 가족을 위로하여 주소서…

6.
주로 나를 위한 밥상을 차리지만 일년에 꼭 하루는 반드시 너를 위한 밥상을 차려야 합니다.
아내 생일.
매번 미역국을 끓일 때 타박을 받아서 이번에는 아내의 취향을 최대한 고려하여 맑고 담백한 미역국을 끓였습니다. 참기름을 전복과 미역의 잡내를 제거하는 정도로만 넣어 볶고 쌀뜬 물과 채수 여기에 마늘과 새우젓을 넣은 국입니다. 생일이니까 전은 하나 있어야 해서 호박전을 하고 남은 계란물로 계란말이까지. 옛날 민중의 희망은 ‘이밥에 고깃국’이었죠. 그래서 평소 먹는 잡곡밥 대신 흰 쌀밥을 짓고 내놓았습니다. 나쁘지 않는 표정으로 밥 한그릇을 말아서 먹고 나갔습니다.
생일에 미역국을 왜 먹을까 생각해봅니다. 여러 이유가 있을 듯 하지만 나름으로는 ‘나를 낳고 키워주신 어머니와 아버지’를 기억하라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부모님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왔는지, 살아가고 있는지를 일년중 한번은 되돌아보라는 뜻이라 생각해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님들에게 따뜻한 미역국 한 그릇을 차려 드렸으면 합니다. 우리 사회가 사랑의 미역국을 드렸으면 합니다. 그 시작은 진상일 듯 합니다.

7.
가수 하춘화와 코메디언 이기동씨가 같이 불렀던 노래…
“영감 왜불러 뒷뜰에 뛰어놀던
병아리 한쌍을 보았소 보았지
어쨌소…”
가사처럼 영감은 나이가 든 남성 혹은 나이든 여성이 나이든 남편을 부르는 말입니다. 관직이름이라는 설도 있지만 일제시대 판사,검사, 군수 등을 부를 때 쓰던 말로 기억합니다.
요즘 국정조사때 나오는 법원장이나 검찰청장을 보면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만 무척이나 나이 든 표정과 어투를 보입니다. 여전히 나이든 사람을 존경하여야 하고 나이는 연륜이라는 생각을 강요하는 한국이라서 그런지 궁금합니다.
하여튼 영감이 왜 영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이런 분을 보고 써야 하는 말은 “애늙은이”라고 해야 합니다.

8.
마약 사건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때 떠오르는 영화.

“아버지와 마리와 나”

오랜 영화이고 마약이 등장하지만 저는 무척 좋게 본 영화입니다.
인기있는 록그룹의 리더였다 대마초로 폐인이 되어가는 아버지.(저는 들국화의 전인권선생을 떠올렸습니다.)
타워 팰리스근처의 고등학교를 다니는 비닐하우스촌에 사는 ‘나'(아버지의 아들.이름은 건성건성살아라 해서 건성…)
아마도 사업이 망해서 부모님을 여인 미혼모 ‘마리’.
마리와 나를 마리와나로 이어서 읽으면…”마리화나”!!!!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연대로 영화를 보았는데.. 지금 보면 어떨지..

9.
6자 때문인지 몰라도 23년 이런저런 병치레를 많이 하네요. 몸이 나에게 옛날처럼 살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내 몸의 소리에 귀를 귀울여야할 때인가 봅니다.
주말 감기때문에 방구석에서 드라마를 여러편 정주행했습니다. 주로 추리물입니다. 영국 드라마 Bodies, 프랑스 드라마 Lupin입니다. 바디스가 흥미로운 점은 1890년, 1941년, 2023년의 영국 런던이었습니다. 특히 1890년이 매력적이었는데 2053년이 등장하면서 무언가 이상해지는 방향으로 나갑니다. 흥미가 떨어지는 ….
반면 루팡은 기억은 가물가물한 추리소설을 매개로 새롭게 창작한 내용이 흥미롭네요. 파리의 여기저기를 보는 매력도 있습니다. 이제 시즌1을 끝냈으니 갈 길이 머네요.
최근 본 가장 매력적인 드라마는 멕시코드라마 탐정 벨라스코아란입니다. 노동자를 탄압하라는 회사 지시를 거부하고 탐정이 된 주인공부터… 70년대 멕시코를 얼마나 사실적으로 묘사했는지 모르지만 다양한 사회적 사건들이 등장합니다. 경찰권력과 마피아 그리고 기업가의 결탁도 나오고 가톨릭 주교의 타락도 등장합니다. 그래도 소수자들의 연대를 인상적으로 그립니다. 동성애자, 노동조합운동가, 도시빈민, 사회운동가 등의 연대입니다.
역시나 현실에 바탕을 둔 드라마가 흥미를 더합니다. 11월에 개봉하는 영화 ‘서울의 봄’은 어떨지..
기대중입니다.

10.
페친이신 루터교 목사님의 설교를 보니까 주일인 오늘 나누는 복음이 같습니다. 마태복음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오늘 아침 미사때의 신부님의 강론과 비교하니 너무 큰 차이를 느낍니다. 솔직히 신부님들 공부 더 하셨으면 합니다. 다양한 신학뿐 아니라 역사, 과학을…
아래 설교에서도 나온 회칙 ‘찬미 받으소서’를 공부하는 수원교구 포스터가 성당에 걸렸습니다. 벽을 통해 알릴 뿐 주보에도, 신부님의 말에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회칙은 누군가의 책꽂이에서 꽂혀있는 낡은 책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아래는 설교중 일부입니다…..

그런데 저는 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을 지금 하고 싶다. 왜 우리 인류가 이런 코로나-19와 같은 고통을 과연 겪어야 하는지 말이다. 그리고 이런 저의 질문에 대해서 많은 과학자는 우리 인류가 경제개발이라는 목적하에 지구 생태계를 무분별하게 파괴했기 때문이라고 답변한다. 이른바 우리 인류의 ‘자업자득’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지금 우리가 겪었던 그리고 앞으로 겪어야 하는 이 고통에 대해서 인류는 할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다시 이런 의문점이 든다. 우리 인류는 왜 이렇게 무분별하게 환경을 파괴하고 또한 생태계를 파괴했던 걸까? 즉 그 중심사상은 과연 무엇일까? 이것에 대해서 학자마다 견해가 조금씩 다르다. 그럼에도 저는 오늘 ‘린 화이트’라는 미국의 중세 역사학자가 1967년도에 제시했던 한 주장을 성도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점은 ‘린 화이트’는 과학자나 생태학자가 아니라, 중세 역사를 전공한 미국의 역사학자이다. 그럼에도, 린 화이트는 1967년 세계적인 과학 잡지인 ‘사이언스지’에 『생태계 위기의 역사적 기원』이라는 유명한 논문을 투고한다. 그는 이 논문에서 생태계 파괴의 주범은 바로 ‘인간 중심적 진보사상’에 있으며, 이러한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주범은 바로 다름이 아닌 ‘우리 기독교의 창조신앙’이라고 고발한다. 그래서 심지어는 우리 기독교는 반생태적인 종교이며 오늘날 우리가 겪은 이 환경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대신에 다른 종교에서 그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까지 그는 주장한다.
물론 린 화이트의 이 주장에 대해 많은 기독교학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기독교윤리학자인 ‘유진 그로브’는 환경 파괴의 주범은 기독교가 아니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라는 창세기 1장 28절의 말씀을 잘못 해석한 우리 인간에게 있지, 그 잘못이 ‘기독교라는 그 종교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듣기에는 린 화이트의 주장보다는 유진 그로브의 해석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판단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 환경 파괴에 대한 경고는 1962년 ‘레이첼 카슨’이라는 여성 생물학자가 당시 농업에서 아주 범용적으로 사용하던 살충제인 DDT의 무분별한 남용이 결국에는 살충제가 죽여야 하는 벼의 해충뿐만 아니라, 별로 상관없는 곤충까지 죽이고, 이 곤충을 먹고 사는 새들까지 결국에는 굶어 죽게 만들어서 봄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새들의 노래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침묵의 봄』이라는 유명한 책에서 이미 경고했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이 책에서 ‘인간 중심적 진보사상’에서 벗어나서 ‘우리 인간도 그저 생태계의 한 구성원일 뿐이다’라는 자숙과 반성을 요청했다. 결국 이 책의 큰 반향으로 환경주의, 생태주의 등의 환경운동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더불어 1972년에는 로마클럽이라는 단체에서 『성장의 한계』라는 책도 발간되었다. 더 이상 인간을 위한 무한 성장은 없다는 경고이다.
우리 기독교 내에도 이런 환경운동에 걸맞게 ‘생태 신학’이라는 분야가 새롭게 대두되었으며, 세계교회협의회는 “사람과 땅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적 세계화”라는 이른바 『아가페 문서』가 발표했다. 로마가톨릭의 프란치스코 교황도 『찬미 받으소서』라는 교황 칙서를 발간함으로써 ‘통합생태론’을 주창했다.
(중략)
그러면 오늘 말씀 속에 등장하는 이 어리석은 농부들은 그저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만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들일까? 그렇지 않다.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마치 우리의 것인 양 착각하며 아주 맘대로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용한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인 동물과 식물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한다. 즉 우리는 매 순간 다른 피조물의 희생을 바탕으로 생존하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미안함과 감사함을 꼭 느껴야 한다. 이 세상 그저 얻어지는 것은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외는 말이다.
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우리 인간에게 당신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잘 관리하라고 부탁하셨다. 이른바 ‘청지기의 사명’을 우리 인류에게 부여해 주신 것이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들의 편리함과 부의 축적이라는 목적하에 파괴하고 무분별하게 개발되는 이 지구의 주인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시다. 마치 오늘 포도원의 진짜 주인은 세를 받아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아니라, 따로 주인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더불어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의 주인도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오늘 말씀 속의 어리석은 농부들이 포도원의 원래 주인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들이 이 포도원의 주인인 양, 주인의 아들까지 죽이는 파괴적이고 무분별한 행동에 대해 주인의 심판을 받은 것처럼, 만일 우리 인류가 이런 ‘청지기로서 임무’를 다하지 못하면 미래에는 온 인류가 하나님께 심판받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지구의 환경은 우리 인류가 아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또 다른 존재에게 맡겨질 것이다.

11.
몇 일 이스라엘과 관련한 트윗을 보면 “이스라엘과 연대를” 라는 해시태그를 단 글이 보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사람이겠죠. 그들이야 그럴 수 있지만 이스라엘과 연대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물론 누구도 저에게 요구하지 않지만(^^)
하마스를 비판하는 글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마스를 비판하려면 같은 수준으로 가자지구를 17년 동안 비인간적으로 봉쇄하고 탄압하는 이스라엘을 비판하여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봉쇄하며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고 생필품 반입도 통제해왔습니다.
이스라엘 민간인의 생명이 귀중하면 그만큼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생명도 귀중합니다.
만약 다른 잣대라고 한다면 인종적인 내로남불이고 종교적인 내로남불입니다…

12.
영화 “졸업” 마지막 장면은 사랑하는 사람과 멀리 떠나는 장면입니다. 출발입니다. 인생은 탄생이라는 시작과 죽음이라는 끝으로 이루어진, 겹겹히 쌓인 시간의 흔적입니다. 한발더 들어가면 수없이 많은 시작과 끝이 보입니다.
시작은 언제나 끝을 예고하지만 그 끝이 어떨지 알 수 없습니다. 실패의 두려움은 이 때문에 생겨납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시작은 나이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어릴 때 시작은 두근거림인데 나이가 들면서 시작은 두려움입니다. 젊음은 실패하더라도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나이듬은 선택을 점점 어렵게 만듭니다. 의도하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는 외통수인생이 됩니다. .
인생은 육십부터. 인생 제2막의 시작.이런 말을 하지만 나이 들어가는 많은 이들은 새로움 보다는 익숙함, 시작보다는 연장을 원합니다.
어떤 삶이 앞으로 기다리고 있던지 작은 변주곡이라도 여럿이 있는 인생을 만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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