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일 이후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그때 그때의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 페북에서 옮겨 남깁니다.

1.
현재 진행형이지만 미수로 끝난 서울의 밤…
살면서 선택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특히 생사의 선택을 하여야 하는 순간들도 있습니다. 7,80년대를 청장년으로 살았던 분들은 현대사와 맞물려 고민의 날을 보냈었을 듯 합니다.
80년 서울의 봄시절 계엄이 내린 서울의 대학생은 선택을 하여야 했습니다. 같은 해 계엄하 광주의 시민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서울은 침목으로 삶을 선택하였지만 광주의 총칼로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87년 말년 병장시절 6.29직전 영내에서는 매일 충정훈련이 진행중이었습니다. 말년이라고 열외였지만 계엄이 떨어지면 군장을 메고 강릉과 속초로 나가야할 상황이었습니다. 고민의 밤이었습니다. 군장을 메고 나가야 할지, 명령에 불복종하여야 할지. 다행히 저에게 그런 선택의 순간은 오지 않았습니다.

어제 밤 국회앞에 모인 시민들도 비슷했을 듯 합니다. 헬기의 굉음이 여의도를 뒤덮고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총을 들고 진입하는 아찔한 순간. 나아갈지, 물러날지 선택을 하여야 했습니다. 그 때 나아가서 지킨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여의도가 아수라장이 된다면 여의도나 광화문이라도 가야 하나…”

서울의 봄이 아니라 서울의 겨울이어서 다행입니다. 지난 밤 여의도에서 민주주의를 지킨 이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정희성 시인의 ‘너를 부르마’를 아침에 부릅니다.

너를 부르마 너를 부르마
너를 부르마 너를 부르마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 하마 사랑이라 하마
아무데도 보이지 않아도 내 가장 가까운 곳
나와 함께 숨 쉬는 공기여 시궁창에 버림받은 하늘에도
쓰러진 너를 일으켜서 나는 숨을 쉬고싶다.
내 여기 살아야하므로 이 땅이 나를 버려도
새삼스레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이름을 부른 뒤에도
그 이름 잘못 불러도 변함 없는 너를 부르마
자유여 민주여 내 생명이여, 자유여 민주여 내 사랑이여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이름을 부른 뒤에도
그 이름 잘못 불러도 변함 없는 너를 부르마
자유여 민주여 내 생명이여, 자유여 민주여 내 사랑이여

2.
1995년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로 뜨거웠습니다. 이 때 서울지검 공안1부장 장윤석 검사는 역사에 남는 말을 합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장윤석 검사는 검찰국장시절 변호사로 재직하던 윤석열을 검사로 채용합니다. 검찰권력으로 집권한 세력은 군사력으로 집권 연장을 시도하였습니다. 실패한 계엄이지만 내란이고 반란입니다.
그렇지만 2024년 12월 5일 해괴한 논리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실패한 계엄은 처벌할 수 없다”
“실패한 계엄은 합법이다”

일제 및 군부독재부터 이어진 보수에게 권력이 민주주의보다 중요합니다. 다시 민주주의가 중요합니다.

3.
PD수첩을 보면서 인상적인 장면은 국회 본관내 바리케이드입니다.

총칼로 무장한 군인들이 밀어닥칠 때 바리케이드를 치고 최소한 시간을 벌기 위한 행동을 합니다. 80년 광주 도청에서 죽음의 두려움을 떨치고 총칼을 든 시민군이 떠올랐습니다.바리케이드는 공격이 아닙니다. 최소한의 방어가 목적입니다. 파업현장의 바리케이드는 노동자의 생존권입니다. 광장의 바리케이드는 집회결사의 자유를 위함입니다. 국회의 바리케이드는 민주주의의 사수였습니다.

군경의 바리케이드를 뚫고 국회로 진입하려고 한 시민..
군인의 진입을 막고 국회 본관에서 바리케이드를 친 시민..
마침내 시민이 승리하리라 생각합니다.

4.
어느 때인가 본당에 서울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신부님이 사회교리를 강의하러 오셨습니다. 강의를 하던 중 앞뒤로 “빨갱이”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신자중 몇 분들이 내뱉은 말입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서울근처 성당의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을 듯 합니다.
교우들이 모이면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정치 이야기를 하지말자…”

선거때 누구를 지지하자라는 식의 갈론을박이면 이해를 할 수 있지만 이분들이 말하는 정치라는 범위는 무척 넓습니다.
가톨릭은 평신도에게 사도직을 수행하라고 말합니다. 이를 위한 교리가 사회 교리입니다. 사회교리는 단순히 복음을 전하라는 뜻만은 아닙니다. 가톨릭이 환경, 노동, 경제, 평화,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를 다룹니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공동선’이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가르침입니다.가톨릭는 사회교리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개입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합니다. 정치를 정당으로 바라보고 분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번주 계속 우울했습니다. 자주 나가는 평일미사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주일미사도 평소와 달리 청년미사때 참례하였습니다. 예상했던 바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대림 2주인 이번주는 인권 및 사회교리 주간입니다. 사회교리주간을 시작하는 때 쿠데타와 민주주의와 관련한 말 한마디가 없습니다. 침묵하는 교회입니다. 주교회의의 성명이나 정평위 성명도 보이지 않습니다.
혹시나 해서 자주 접하는 루터교 목사님의 강론을 읽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누가복음 3:1-14)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오늘 주일 공동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교우에게 함께 있기를 바란다.
지난주는 우리 대한민국 역사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령 선포 이후, 44년 만에 계엄령이 이 땅에 다시 선포되었다. 그럼에도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국민은 여전히 매우 불안해하며 우리나라의 국제 관계, 경제의 타격이 매우 크다. 그러면 이렇게 국가와 사회가 불안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중략)
그러므로 아무쪼록 우리 팔복교회 성도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그러나 이 불안하고 어지러운 시대에 우리 안에 있는 성령에게 나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하며,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직무와 사명을 내 자신의 힘이 아닌, 성령의 힘으로 성도 여러분들의 삶에서 온전히 실천할 수 있기를 저는 소망해 본다. 그리고 그 실천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삶의 자리와 나에게 맡겨진 일들에 대해 남용하지 않고 충실한 태도로 성실하게 임하는 것이다. 더불어 한 국가의 위대한 시민으로서 올바른 의무와 권리를 다하는 것이다.

가톨릭이 이렇게 가르칩니다.

“참된 민주주의는 단지 일련의 규범들을 형식적으로 준수한 결과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존엄, 인권 존중, 정치 생활의 목적이며 통치 기준인 공동선에 대한 투신과 같이 민주주의 발전에 영감을 주는 가치들을 확신 있게 수용한 열매이다. “

사제는 질문하여야 합니다.

“지금 한국 민주주의는 참된 민주주의입니까? 사회 교리를 실천하여야 하는 평신도는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그런데 사제는 침묵합니다.

5.
여의도집회…

옛날 광화문과 비교해보니까 참가자들이 달라 보였습니다. 물론 아이들과 함께 나온 부부들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합니다.
예전과 다른 점. 여성 청년들이 남성 청년을 압도한 듯 합니다. 숫자를 세거나 관련한 보도가 없으니 아주 사적인 추측입니다. 왜 그럴까 집회 순간순간 생각해보았습니다. 여성 청년중 혼자인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합니다. 또래이거나 터울이 크지 않은 분들과 함께 합니다. 관계의 성격도 공식적이지 않았습니다. 흔히 아는 무슨무슨 노동조합이나 무슨무슨 단체가 아니었습니다. 친한 사람들끼리 손잡고 마실 나온 듯 하였습니다. 대학을 들어간 이후 사회에서 제 몫을 하려고 하는 딸들을 보면서 든 느낌과 비슷합니다. 무척이나 다양한 관계를 맺습니다. 조직이 아닌 흥미, 취미 등으로 이어진 다양한 관계들입니다. 관계맺기에서 남성보다 여성들이 잘합니다. 이런 특징들이 집회에 반영되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듣던대로 k-팝 공연장 같았습니다. 모르는 노래보다는 아는 노래가 많아서 흥겹게 놀고 투쟁하였습니다. 다만 수많은 집회에 함께 했지만 ‘아침이슬’없는 집회는 처음이었습니다. 아침이슬이 ‘다시 만난 세계’에 밀려나는 느낌입니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냅니다.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아쉬웠습니다.

한가지 눈에 띄는 점. 자주자주 무지개 깃발과 동성애를 상징하는 문구가 보였습니다. 소수라고 하더라도 ‘함께 사는 우리 이웃’이었습니다.

이제 86세대들이 물러날 때입니다.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길을 열어줄지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쫓겨나듯 밀려나지 않습니다.

6.
수원교구 홈페이지 시국선언문.

천주교 수원교구 사제단 공동 시국선언문
“내란 수괴 현행범 윤석열을 조속히 탄핵하라!”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이사야 9,4~5)
우리 국민들은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성탄과 연말연시를 준비하던 12월 3일에 충격적인 사건을 접해야 했습니다. 대통령이 야당과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시민들을 반국가단체요 국가전복 세력으로 지칭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윤석열은 계엄령 선포를 통해 국회와 지방 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도록 하는 등, 군사독재 시절에나 있을 법한 포고령을 발표한 것입니다. 계엄령이 실현되었다면, 우리 순수한 국민들은 가히 상상할 수 없는 비극과 고통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은 천인공노할 윤석열의 만행과 총부리 앞에서 결연한 의지로 이를 막아섰고, 국회의원들은 신속한 결단으로 계엄령 해제를 의결했습니다. 이는 1980년 광주시민들이 흘린 피에 대한 역사적 부채 의식을 갚으려는 민주시민들의 용기와 헌신 덕분이었습니다.
지난 2년 반, 윤석열은 아무런 법적 권한도 부여받지 않은 아내에게 권력을 쥐어줌으로써, 비상식적인 만행을 저질렀고, 국격은 추락했으며, 민생은 갈수록 어려움을 더해 갔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앞에서 우리 가톨릭 교회와 신자들은 시국미사와 시국선언을 통해 윤석열의 회개와 정책 전환을 요구해 왔지만, 권력자 놀이에 빠진 윤석열은 눈을 감고 귀를 닫았습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사목헌장 1항)
우리 수원교구 신부들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의 벗이요(요한 15, 16),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님(마태 20, 28)을 본받아 시대의 고통과 아픔에 함께하며 선포하고 외칩니다.
‘이제 당신은 이 나라의 대통령이 아니오! 내려오시오!’
우리는 내란수괴 현행범, 정신 치료가 필요한 윤석열에게 이 나라의 운영과 운명을 맡길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그가 모든 직무에서 벗어나지 않고 여전히 국군 통수권자라는 사실이 앞으로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불행, 불안과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한시도 용인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천주교 수원교구 사제단은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복음의 기쁨 183) 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윤석열의 즉각적인 탄핵과 지은 죄에 대한 엄중한 수사와 처벌을 요구합니다.
수원교구 사제단은 국민과 함께 이 사태의 해결 과정과 처벌을 날카로운 시각으로 지켜볼 것이며, 세상의 평화와 공동선 실현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할 것을 다짐하며 아래와 같이 요구합니다.
1. 내란 수괴 현행범 윤석열을 즉각 탄핵하고 구속 수사하라!
2. 내란 공모자들을 즉각 직위 해제하고 구속 수사하라!
3. 국민들이 동의할 수 있는 특별 기관이 주체가 되어 한 점 의혹도 없이 철저히 수사하라
2024년 12월 13일
천주교 수원교구 사제단 일동

7.
교황 회칙 ‘작은 형제들’과 관련한 글을 읽으면서 가슴에 꽂힌 말씀.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1요한. 4,20)

주석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필자는 단순히 볼 수 없는 하느님보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쉽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기에서 한 가지 신학적 진리를 말한다. 하느님과 관련해서는, 우리의 사랑이 성부와 성자의 사랑에 동참하지 않고(4,8 각주 참조)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로 표현되지 않는다면(마태 25,40.45 참조), 그것은 순전히 환상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세상을 보면 ‘환상’속 믿음을 가진 이가 너무너무 많습니다.

8.
대한민국은 법적인 절차가 진행중이지만 총성없는 내전상태입니다. 1차 계엄이후 반동일지, 수호일지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투쟁입니다. 반란을 진압해야할 것이 민주시민의 의무라는 생각을 합니다.
옛날이 떠오릅니다.

12.12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노태우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법적인 심판대에 오릅니다. 법정에서 무기징역 등의 처벌을 받았지만 김영삼과 김대중의 비공식적인 협의에 따라 97년 사면으로 세상에 나옵니다.
반성과 사과없는 사면을 하지 않았고 청산작업을 계속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나아갔을까 상상해봅니다.

박근혜탄핵이후 2017년 계엄령 문건 사건으로 계엄을 준비했다는 점이 드러났습니다. 박근혜 국정농단수사로 권력을 쟁취하여 나가던 검찰은 수사를 흐지부지하였고 결국 계엄령과 관련하여 아무도 처벌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또 검찰은 선출된 권력인 문재인 정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집단으로 등장합니다.

문재인정부가 검찰과 계엄령사건을 철저히 단속하였다면, 검찰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리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단언할 수 없지만 윤석렬반란사건의 뿌리는 전두환 사면이 시작이지 않을까 합니다. 암을 도려내지 못하고 뿌리를 남겨둔 것이 불씨입니다.

내란사건에서 반헌법적인 지시를 아무런 저항없이 복종하는 문화를 봅니다. 저항으로 얻을 불이익보다 복종이 가져올 이익을 더 중히 여깁니다. 역사적인 평가를 떠나 헌법적 의무나 직업윤리는 실종했습니다. 김영삼정부가 초래한 IMF이후 각자도생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한 사면 이후의 역사가 ‘승리한 쿠데타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말을 보여주었기때문입니다.
떠오르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一罰百戒(일벌백계)
信賞必罰(신상필벌)

이를 속되게 표현해보죠.

“반드시 죄값을 치러야 한다.”

시민에게 당연한 것이 권력자들에게도 당연한 것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역사의 정의가 살아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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