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전야, 매월 목욕 봉사를 하고 있는 병원을 찾았습니다. 병원에 있는 환자들을 위한 미사에 참례하고 봉사를 하기 위함입니다.
신부님이 강론중 예수 탄생의 의미를 ‘구유’와 ‘목자’로 말씀하셨습니다.
마굿간의 구유는 세상에서 더럽게 가장 낮은 곳입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말에게 여물에 먹이는 그릇인 구유속에 놓인 예수님은 당신을 제물로 바치는 십자가의 제사를 예시합니다. 예수의 탄생을 가장 먼저 알았던 목동들은 그 시대 가장 더럽고 힘든 일을 하는 노동자였습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은 노동자입니다.
그러면서 교황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는 안에 스스로 갇혀지고 보호벽에 달라붙어 있는 탓에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버깥에 나간 탓에 상처 받고, 맘 상하고, 더러워진 교회를 더 좋아한다. 나는 중심에 있으려는 데만 주의를 기울인 끝에 강박 관념과 절차의 망에 갇혀 있는 교회를 바라지 않는다.”
어렵고 힘든 2013년의 끝자락이지만 가슴속 어느 곳에서 ‘따뜻한 희망의 기운’이 모든 이에게 솟아오르는 은총이 있는 성탄이기를 바랍니다.
항상 아픈 이와 함께 하시는 강우일 주교님의 성탄 말씀입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사야 49,15)
교형자매 여러분, 구세주 예수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벌써 한 해가 다 가고 우리는 또 다시 성탄절을 맞이합니다.성탄절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와주신 것을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는 때입니다.성탄은 2천 년 전에 한 번으로 끝난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성탄은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을 만나려고 기다리는 이들에게 수없이 다시 일어나는 오늘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시는 분이시고 오늘도 우리 가운데 오시고 우리에게 위로와 축복을 선물하기를 열망하고 계십니다.
요즘 많은 이들이 세상이 평안치 못하다고 느낍니다. 노동자는 일자리 때문에 내일이 불안하고, 농민들, 어민들은 아무리 땀 흘려 일해도 생산비도 안 나와 좌절합니다. 노인과 병자들은 앞날을 염려하고, 가정에서 부모들은 있는 힘을 다해 맞벌이해도 아이들 학원비 때문에 허리가 휩니다. 시험과 경쟁 때문에 어린이들은 꿈을 잃고 젊은이들은 인생의 좌표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몰라 헤매기만 하다가 희망을 접고 삽니다. 날이 갈수록 소득격차는 심화되고 대자본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시장 구조는 너무나도 견고해, 낮은 데 있는 사람이 아무리 젖 먹은 힘까지 다 내어도 기어오를 수가 없습니다.
가난하고 배경 없는 이들도 같은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법을 바로 세우고 정의로운 판단을 내려주어야 할 위정자들과 사정당국이 도리어 오직 기존 체제를 지키려고만 하고,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 편이 되어 이들만을 보호하는 편파적인 현실을 너무 자주 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한쪽으로 기울어진 세상, 비뚤어진 세상을 어찌 보고도 못 본 척 하실까, 어찌하여 욕심 내지 않고 올곧게 살려는 사람이 더 고통 받고 더 힘들게 살도록 내버려 두실까, 이런 넋두리를 늘어놓고 싶은 세상을 우리는 매일 경험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보고도 못 본 척 하지 않으십니다. 고통 받는 이들의 모습을 지척에서 지켜보시고 그 신음 소리를 듣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예수님은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군마에 높이 올라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시골 처녀에게서 태어난 갓난아기로 오셨습니다.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힘겹게 사는 작은이들의 친구가 되고 벗이 되기 위하여 가난한 노동자 가정의 어린 아기로 오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이런 작은이들 곁에 여전히 오고 계십니다.
힘 있는 이들에게서 땅과 집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구를 이끌고 싸우다가 내동댕이쳐지고, 실려 가고, 짓밟히다 좌절하고 분신하고 농약을 들이키는 밀양의 농민들을 외롭게 내버려둘 수 없어 함께 고함치고 함께 울고 함께 싸우는 벗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예수님도 오십니다.
쌍용차 노동자 3천여 명이 집단해고 당하고 그 억울함과 좌절로 23명이나 되는 이들이 차례로 목숨을 끊으며 절망의 골짜기로 추락하였습니다. 이 극한적 상황에서 이들의 슬픔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 함께 하느님께 도우심을 청하고, 세상의 관심과 도움을 청하기 위해 대한문 앞에서 매일 미사를 거행하는 벗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안에 예수님도 함께 오셨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끊는 절망의 추락이 멈추었습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이사야 2,4) 는 주님의 말씀에 희망을 걸고, 7년씩 싸워 온 강정 지킴이들이 있습니다. 전쟁 준비보다는 생명과 평화를 선택하고 이를 선포하기 위해 비폭력으로 맞서다가 연행되고, 얻어맞고, 재판받고, 감옥살이마저 두려워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많은 벗이 있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땡볕이 내리쬐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전국 여기저기서 찾아와주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외치고, 함께 팔짱을 끼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 벗들 안에 예수님도 함께 오셨습니다.
오랜 병환으로 가족들도 찾아오지 않는 병자들 곁을 찾아주고 위로해주고 함께 머물러주는 봉사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 안에 예수님도 함께 오셨습니다. 감옥에 갇혀 더위와 추위에 시달리고 외로움과 두려움에 짓눌리는 재소자들 곁에 찾아와 용기를 북돋아 주고 믿음을 심어준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안에 예수님도 함께 오셨습니다.
잊혀져가는 노인들, 장애인들 곁에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간 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 손을 잡아주고 몸을 닦아주고 밥을 먹여주고 함께 노래하고 함께 춤추어 준 벗들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이 손길들 안에 예수님도 오셨습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하느님은 이렇게 어제도 오늘도 방방곡곡에서 우리 가운데 와주고 계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못 본 체하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사야 49,15) 하고 고백해주신 분입니다. 우리가 우리 피붙이와 우리 이웃을 잊어도 하느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작은이들, 힘없는 이들, 눈물 흘리고, 외로워하고, 정의에 목말라 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어디 있는지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 찾아가고 보살피고 함께 할 때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고 거기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형제를 못 본 체할 때 사실은 하느님을 못 본 체하고 하느님을 세상에서 밀어내는 것입니다. 말구유에 놓인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와주신 평화의 주군 예수님께 배우며 우리도 서로에게 우리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의 파발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강생하여 사람이 되어 오신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가득히 나누어 받으시고 평화와 희망이 넘치는 새해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2013년 성탄절에
제주 교구
강 우 일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