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성지순례 – 하남 구산성지

1.
소박한 다짐으로 시작한 자전거성지순례. 어느 자료를 보니 전국으로 성지가 백여곳이 넘는다고 합니다. 한 달에 몇 곳을 다녀도 몇 년이 걸립니다 . 순례를 하는 동안 몸과 마음이 성하길 기도합니다.

수리산 성지를 다녀온 이후 한번 더 수리산을 찾았습니다. 동행은 레지오모임을 같이 하는 분들이었습니다. ‘혼자’와 ‘함께’가 다르더군요. 솔직히 저는 기도를 하든 무엇을 하든 혼자가 좋습니다.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들이 떠난 후, 모든 이들과 멀어진 이후 혼자서 길을 나섰던 이유도 자유입니다. 힘 들던 때 나는 일으켜 세워준 ‘나는 걷는다’를 쓴 베르나르 올리비에. 제주를 방문하여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혼자 걸어야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다. 생각도 자유로워진다. 상상력이 부족해졌다고 느낄 때 나는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걷는다.”


지난 토요일 오전 집안 일을 마치고 일요일에 비가 온다는 예보도 있어 급히 옷차림을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화성 남양성모성지로 갈지, 하남 구산성지로 갈지 고민하다고 가까운 곳을 택하였습니다. 오랜만에 찾은 한강은 가을색이 깊더군요. 4대강의 영향으로 곳곳에 안내판이 들어선 것도 달라진 점입니다. 구산성지는 처음입니다. 하남에 들어서서 물어물어 찾았습니다. 올림픽대로를 사이에 두고 북쪽이 조정경기장과 자전거도로, 남쪽이 구산성지가 있더군요. 몇 년전 구산성지를 찾았던 순례자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올림픽 도로를 벗어나니 작은 시골길로 들어섰다.말이 하남시 망월동이지 시골 동네나 마찬가지 이다.겨우 차한대 지나갈 정도의 도로다.시골길이라도 도로 포장이 되어있어 차들이 다니는데는 지장이 없다. 도로 양옆에는 가을에 대표적인 꽃인 코스모스 꽃등 다양한 꽃들이 총천연색 으로 활짝피어 태양의 빛을받아 더욱 아름답게 보여지나가는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그런데 신호를 받아 들어선 곳이 공사판이었습니다. 이곳저곳 고층아파트를 세운다고 트럭이 어지럽게 다닙니다. “이곳에 성지가 있나?”는 의문을 가집니다. 도로안내판을 따라 몇 백미터를 가면 아직 허물지 않은 집들이 보입니다. 구산성지입니다. 재개발로 고층아파트로 둘러싸인 용산 당고개성지가 떠오릅니다. 나중에 어떤 모습일지…

2.
구산성지 곳곳을 옹기가마에서 구은 기와로 장식하였습니다. 입구, 십자가, 묵주기도의 길, 십자가의 길, 성인 묘역이 옹기가마에서 나옵니다. 몇 곳을 다니지 않았지만 옹기에 담긴 뜻이 깊었습니다. 김훈선생의 ‘흑산’을 보면 옹기가마는 노동의 터이면서 도피처입니다. 일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신앙입니다.

옹기로 순교의 뜻을 표현한 구산성지는 개인순례자를 위한 십자가의 길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삶을 박해 때 순교한 성인과 순교자들을 통해 보여줍니다. 기도문의 울림 또한 오래 남습니다

성지를 찾은 느낌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지만 급히 나오는 바람에 건전지를 검사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날 다시 찾으려고 합니다. 대신 다른 순례자들의 사진을 소개합니다. 구산성지 – 십자가의 길구산성지 십자가의 길 순례에 올린 사진들을 편집하였습니다.

3.
순교성지를 찾을 때마다 순교의 의미가 어렵습니다. 어느 행사에서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데올로기적, 민족-인종주의적, 그리고 광신적-종교적 절대주의의 요구에 직면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키신 그 자유를 위해 투신한다는 점에서 초대교회 순교자들과 오늘날 순교자들은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교적 동기에서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위해, 자유를 위해, 정의를 위해 투신하고 목숨을 바치는 것 역시 신학적 의미에서 순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연대성과 박해받고 억압받는 이들과의 연대성을 새로이 확고하게 하는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을 계승하자”

강우일주교님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기념 심포지엄에서 하신 말씀도 같은 뜻이 아닐지요.

“한국 교회가 여전히 공의회 이전의 사고와 교회관, 세계관에 머물면서, 아직도 세상을 향한 울타리를 완전히 허물지 못하고, 울타리 안에서의 친교, 동네잔치에 자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구산성지 십자가의 길에 쓰여진 우리의 기도 또한 그러한 듯 합니다.

나의 고통
누군가의 어려움
그리고 그 모든 고통에 함께 한다는 것!

그것은
주님, 당신의 십자가 무게를 나누어 지고 가는 것이며,
나의 구원, 세상 구원에 이르는 값진 댓가임을 알게 하소서.

그리하여 함께 나누는 삶의 무게는
더 이상 고통이 아니고 기쁨과 희망의 약속이며
영원한 구원의 시작임을 깨닫게 하소서

Leave a Comment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