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4월 15일과 5월 27일사이에 일어난 일은 단 하나 비판의 대상이 죽었다는 점입니다. 4월 15일은 노무현정권의 부패로 인하여 민주진보진영에 씻을 수 없는 재앙을 주었고 합니다.
노무현은 범죄와 도덕적 결함의 차이, 남편과 아내의 차이, 알았다와 몰랐다의 차이를 구별하는 데 필사적이다. 그러나 그런다고달라지지 않는다. 참여정부의 실정으로 서민들이 가난해지는 동안 노무현 패밀리는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재벌 개혁을 다짐하고는 삼성에 국정을 의탁하고, 특권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하고는 스스로 특권층이 되고, 시장 개혁 대신 시장 만능의 우상을 퍼뜨림으로써 노무현을 통해 세상의 낡은 질서를 바꾸려 했던 그 열정을 싸늘한 냉소로 바꾸어 놓고, 절망 속에 빠진 서민을 버려두고 자기들은 옥상으로 피신해 헬기 타고 안전지대로 탈출하려 했다는 사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대통령 패밀리끼리는 건드리지 않기로 하자”고 했다던가. 그들에게는 정권교체가 패밀리 교체, 아니 이권 교체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랬기에 수많은 절박한 이들의 구원의 손길을 뿌리치고 그 마지막 헬기를 향해 손 내민 한 사람만 더 태우고 떠나려 했을 것이다. “우리 쪽 패밀리에는 박연차도 포함시켜 달라.” 우리는 이제 민주화 세력이 아닌, 의리·이권·혈연으로 뭉친 이 패밀리가 진정한 집권세력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몰랐다’는 점을 노무현이 더 설득력 있게 해명한다 해도, 자기 정권의 존재 이유였던 개혁을 포기하면서도 그토록 지키려 했던 패밀리의 안전과 그들이 축적한 부를 지키기는 어려워 보인다. 물론 그는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5년간 되풀이 했던 그 신물 나는 <노무현의 투쟁> 속편을 끝까지 보여주고야 말 것이다.
자신이 뿌린 씨앗 거두고 가길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집권한 그는 민주화 운동의 인적·정신적 자원을 다 소진했다. 민주화 운동의 원로부터 386까지 모조리 발언권을 잃었다. 그를 위해 일한 지식인들은 신뢰와 평판을 잃었다. 민주주의든 진보든 개혁이든 노무현이 함부로 쓰다 버리는 바람에 그런 것들은 이제 흘러간 유행가처럼 되었다. 낡고 따분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 이름으로는 다시 시민들의 열정을 불러 모을 수가 없게 되었다. 노무현이 다 태워버린 재 속에는 불씨조차 남은 게 없다. 노무현 정권의 재앙은 5년의 실패를 넘는다. 다음 5년은 물론, 또 다음 5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다면, 노무현 당선은 재앙의 시작이었다고 해야 옳다. 이제 그가 역사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이 뿌린 환멸의 씨앗을 모두 거두어 장엄한 낙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굿바이 노무현’중에서
2.
5월 27일엔 수백만의 노무현으로 부할하자고 합니다.
대한문 앞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 ‘가난한 자들의 친구, 서민의 수호자.’ 그의 성공과 실패의 본질을 말해준다. 가식적인 찬사는 그를 거짓되게 할 뿐이다. 그의 실패에 깊이 절망해 본 자들이야말로 진정으로 그의 고뇌, 그의 슬픔에 닿을 수 있다. 그를 정당하게 비판했던 자만이 그의 죽음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그를 올바로 미워한 자만이 그를 사랑할 수 있다. 그의 돈 많은 친구나 한 자리씩 차지했던 고위관료, 그의 은혜를 입은 지인들이 진정 노무현의 가치를 사랑했을 것 같은가. 그들이 이 거리에 감도는 특별한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가. ‘빽’ 없고 돈 없고 힘 없는 이들이야말로 진실로 노무현을 사랑한 이들이었지만, 그들은 정작 그가 죽어서야 그를 되찾을 수 있었다.
……
수백만의 노무현으로 부활하자그래, 다시 시작하자.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우리가 이 길로 들어섰던 것일까. 이 ‘살인(殺人)의 권력’ 앞에 이렇게 초라하고 무기력해진 것은 무슨 까닭일까. 오직 순수와 정의의 뜨거움으로 달리던 그 많던 노무현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시대의 요청에 기꺼이 응답하던 열정들은 어디로 갔나. 국가는 다시 압제의 도구로 변했고, 정치는 작동하지 않고 시민사회는 죽어가고 있다. 하나의 노무현이 죽어 수만, 아니 수백만의 노무현으로 부활하는 대반전을 맞이하자. 그래서 피 끓는 청춘의 시대로 돌아가자. 오, 정녕 꿈인가?
‘덕수궁 돌담길의 초혼‘중에서
물론 자신의 논리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비판’하였던 자들이야 말로 올곧게 ‘노무현’의 정신을 이어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전 비판이 노무현 정신마저도 부정하였다는 사실을 잊었는지는 모르지만…
3.
무엇이 이렇게 변화하게 하였을까? 아마도 500만명이 넘는 추모, 추모속에서 온전히 살아아는 인간 노무현의 삶이 아닐까 합니다.
나 스스로 사람을 판단하고 이해할 때 온전한 삶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노력하려고 합니다. 지도자를 만들려면 오랜 노력이 필요하지만 지도자를 잃는 것은 순간이라는 점도 잊지 않으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