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전 6.10에 나는~~~~~

6.10항쟁이 금년으로 20년이라고 합니다. 20년이면 강산이 두번 바뀌는 시간일 정도로 긴 시간입니다. 20년전 그 날 저는 거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군대에서 현역복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84년 가을 학생회때문에 무기정학을 받고 학생운동을 계속 하고 있다가 85년도 선거와 관련된 일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부모님의 강력한 의견을 반강제적으로 84년 12월에 일본으로 출국하였습니다. 결국 제가 하기로 한 일을 수습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도망(?)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45일동안 일본에 있는 친척집에서 가끔은 여행을 주로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때 마르크스레닌전집이나 김일성전집이 일본공공도서관에 있는 것을 보고 무척이나 놀라웠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될 때마다 오오사카에 있는 천왕사도서관에 레닌선접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85년 선거가 끝이나고 다시 귀국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있다가 입영영장을 받고서 논산훈련소에 들어갔습니다….45일동안 나가있어서 거의 모든 사람에게 연락을 끊긴 상태에서 그냥 무작정 군대에 갔습니다. 320 주특기로 동해안 건봉사와 간성근처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서 87년이 되었을 때 연초부터 여러가지 사건을 뉴스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제대를 한 달앞두고 6.10항쟁의 시작을 뉴스에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부대안의 분위기도 심상치않게 돌아갔습니다. 충정훈련=시위진압훈련을 주둔지에서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말년 고참이라는 이유로 훈련에 직접 참가하지 않고 대대교환병을 보면서 자리를 비켜서 있었습니다만…
그런데 문제는 6.29일 되기 한 주전쯤에 발생했습니다. 갑자기 전부대원이 완전군장으로 부대에서 대기하라는 것입니다. 뉴스에서 “위수령”에 대한 소문이 나오고 있었고 부대안에서 그런 분위기가 감지되었습니다. 고민이 많았습니다. 강릉에 배치되는 것으로 되었는데 강릉에 나가면 어떻게 해야 하나…발포하는 상황이 생기면 어떻하나…80년 광주에 있던 군인들의 고민이 하나씩 둘씩 떠올랐습니다..그런 고민으로 하루밤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아무일이 없었던 것처럼 정상으로 돌아갔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때 실제로 위수령을 선포하려고 했고 전두환과 노태우가 단판을 졌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노태우는 저의 아주 중요한 고민하나를 덜어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무사히 7월초에 제대를 했고 이래저래 대학 동아리친구들 – 저는 고전연구회라는 동아리에 있었습니다 – 수소문하여 몇번 만났고 그 때 정세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등포에 있는 성문밖교회에서 열리는 시국토론회에서 몇번 가서 보면서 지난 3년동안 운동권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있었죠…이 때 또하나의 고민을 저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부몬임은 제대후 미국으로 유학갈 것을 요구하셨고 저는 이를 놓고 계속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갈까 말까~~~도저히 학생운동을 했던 그 생각으로 판단할 때 유학을 가는 것은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군대에서 모아두었던 200만원을 가지고 가출(?)을 해서 친구와 함께 도림동에서 자치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있다가 공장에 취직을 하였고 선반일을 하였습니다. 아마도 87년 6월이 없었다면 저는 미국으로 갔을 것이고 현재와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세상을 살고 있지않을까 합니다.
 
살아오면서 지난 25년동안 사회운동과 관련한 선택에 대해 후회를 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군대에 간 것은 그렇지만…군대에서 저도 많이 배웠다고 생각했습니다…..사람들과 같이 사는 그런 경험….유학을 포기하고 공장에 취직한 것.공장을 나와서 서울노동운동단체협의회의 간사로 일을 한 것. 노운협이 분열되면서 구로동에 서울노동운동연구소를 만든 것…그러다가 바른정보를 만들어서 정보운동을 시작한 것. 그리고 바른정보를 진보네트워크센터에 기증한 것. 넥스트웨어를 같이 설립한 것까지..하나하나가 선택이었고 그 선택에서 많은 잘못을 했지만 그렇다고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저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니까요!!!

6.10이 저에게 준 것은 사회운동의 소중함이 아닐까 합니다. 학생때 하는 운동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 여러가지의 모습을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삶이 소중하는 것을 저에게 가르쳐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그런 삶의 가치를 지킬 수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회사의 생존을 먼저 걱정해야 하니까요? 이중적이라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순간 순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때 조그만 실천이라도 하겠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어제 중안 SUNDAY에 나온 차인표씨의 선행처럼….사회발전이라는 것이 꼭 거대담론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관계 하나하나가 개선될 수 있다면 그것도 소중하다고…..

해방이후 오늘까지 자신의 하나뿐인 목숨을 크고작은 대의를 위해 바치신 모든 분들에게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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