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영등포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고향같은 곳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30대초반까지 살았고 부모님이 저와 동생을 키울 수 있게 해준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영등포가 변화를 시작한 것은 롯데백화점이 들어설 때부터 입니다. 예전부터 영등포는 교통중심이어서 물류부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커다란 시장이 두개나 있었습니다. 영등포교차로를 사이에 두고 일반시장과 청과시장이 있었습니다. 물론 해방후엔 철도청 기지창이 있었습니다.
롯데,신세계,경방필백화점등이 들어서면서 시장은 활력은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청과시장도 영등포에서 내쫓겼습니다. 영등포는 생산(?)의 도시가 아니라 소비와 유흥의 거리로 변화하였습니다.
영등포는 항상 두개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장을 중심으로 한 번화가는 화려합니다. 바쁩니다. 번잡합니다. 야간에는 유흥가로써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 롯데백화점,신세계백화점뒤편, 영등포시장에서 북쪽등등 – 사라져가는 삶이 보입니다. 좁고 어둡고 지치고 아프고.
그곳에 언제부터 노숙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영등포를 떠난 이후가 아닐까 합니다.롯데백화점뒤에 0.6평짜리 쪽방이 그분들을 모이게 했나 봅니다. 그리고 그분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인 분들도 모여들었습니다.
영등포역앞을 버스를 타고 지날 때 자주 보던 모습이 있습니다. 점심전후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모습입니다.
어제 오전에 영등포슈바이처 선생님이 하늘로 가셨습니다. 욕망의 거리에서 사랑으로 한 평생을 실천하신 분입니다.일하고 사랑을 실천하신 선생님의 밝은 미소를 이땅에선 다시는 볼 수 없습니다.삼가 명복을 빕니다.
선우경식 원장님의 글입니다.
어느덧 16번째 봄이다. 계절이 바뀌면 이곳 환자들도 긴 동면을 무사히 끝내고 진료실로 하나 둘 봄나들이를 시작한다. 봄이 훨씬 지나서도 진료실에서 환자를 만날 수 없다면 십중팔구 이승에선 만날 수 없게 된다. 의사로서 노숙자, 행려환자들만 만나게 되니 일정한 주거나 연락처 없는 환자들 소식, 수술 후 경과나 치료 후 상태가 궁금해도 확인할 수 없는 때가 많다. 그러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나 비로소 살아 있음을 확인하다.16 년 전,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되풀이되는, 환자와 의사간의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 무슨 의미가 있는 가 고민을 많이 했다. 노숙과 알코올 중독에서 오는 자포자기로 삶을 포기한 이 환자들이 완치되는 경우는 가물에 콩 나는 격이다.
이들에게 가장 확실한 미래는 가족의 품이 아니라 길거리 어느 모퉁이에서, 혹은 시립병원의 쓸쓸한 병실에서 외롭게 한 많은 생을 마감하는 것이기에 새 삶을 찾으려는 의지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니 한번 인연을 맺으면 하늘이 준 인연이라 여기며 연민으로, 때로는 분통으로 치다꺼리를 해왔다. 좀 모자라서 제 것 못 챙기며 속 썩이는 자식을 가장 염려하고 마음 쓰는 게 부모이듯, 의사인 나는 가장 속 썩이는 환자라 할 요셉의원 환자를 진료하는 것이 모든 의료행위의 ‘꽃봉오리’라고 여긴다. 다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이 일에 매달 린지 어느덧 십수년. 가장 무능력한 환자, 다시 말하면 진료비를 한 푼도 낼 수 없는 이들이 다른 어떤 환자들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보물임을 발견한 것도 이 진료실이며 그런 이유 때문에 지난 세월 진료실을 떠날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이 환자들은 내게는 선물이나 다름없다. 의사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는 환자야말로 진정 의사가 필요한 환자 아닌가.이렇게 귀한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나는 감사하고 이런 선물을 받았으니 보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겨울동안 꼭꼭 닫아두었던 창문이 조금씩 봄기운에 밀려 영등포역의 시끌시끌한 소란을 진료실로 전하기 시작하는 것과 때를 맞춰 병원 아래층 현관에서 귀에 익은 고함소리가 들린다. 지난겨울 술 끊으라고 누누이 당부했건만 오늘은 또 무슨 핑계거리를 들고 나를 찾아올지… 16년 단골환자의 봄나들이가 시작되었다.
이제는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 진료실에 오지 않으면 혹시나 하며 안부가 걱정된다. 그렇다고 이렇게 만취해 진료실을 찾으면 환자가 아니라 원수로 보인다. 그러나 어쩌랴. 그 춥고 긴 겨울동안 살아 있어주었으니 장하지 않은가. 이렇게 해서 의사인 나는 새 봄을 환자들과 함께 시작하는 행복을 누리며 한편으로 갈등한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환자들의 봄나들이를 반가워해야 할까, 안타까워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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