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동네 앞산, 뒷산, 옆산을 자주 오르내립니다. 22년도 첫 진달래는 몇 주전 우면산 중턱입니다. 오직 한 그루의 진달래만 꽃을 만개하였습니다.
몇 주가 지난 요즘, 자주 가는 관악산 곳곳이 진달래로 가득하네요. 이윤선 님이 전남일보에 연재하였던 ‘봄의 전령 진달래, 그 슬픈 기억의 소환’ 일부..
이제 며칠 있지 않으면 남도의 산하 아니 한반도 전 산하가 진달래로 물 들 것이다. 봄의 전령 진달래의 만개를 맞이하며 상고할 바가 한둘이 아니다. 진달래가 표상하는 것은 봄이요 아픈 기억의 환기요 잃어버렸던 것들의 재구다. 이른바 기억의 재현이자 생각의 재구성이다. 무엇을 재구할 것인가? 한 때 진달래를 거론하기만 해도 북한의 꽃이라 해서 경기를 일으키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그러한가? 그때로부터 멀리 돌아와 다시 봄을 맞이한다. 올해는 봄의 전령 진달래가 어떤 기억들을 데리고 올 수 있을까? 잊혀진 자들에 대해 생각한다. 잃어버렸던 시대에 대해 생각한다. 꼬까비를 다시 생각한다. 참꽃을 다시 생각한다. 진혼(鎭魂, 혼을 눌러 제압한다는 의미가 강하다)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과 원한을 다시 불러들여 새롭게 시작하게 하는 위령(慰靈)의 봄을 생각한다. 진달래는 잊고 싶었던 시대도 불러낸다. 분단의 시대, 살육의 시대들이다. 아프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생각을 재구성하라는 뜻이다. 그래서다. 융합의 시대 비전의 시대 그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게 하는 재생의 봄이었으면 싶다. 그렇다고 통일을 앞세우는 것은 만용이다. 통일일랑 아예 저만치 밀어두고 잊혀졌던 진달래만을 이야기하자. 폼 나고 육중한 일들이 아니라 작은 단위의 꽃들을 이야기하자. 기품 있는 시인묵객들의 것이 아니어도 노래방에서 소주 한잔 하고 불러내는 이미자의 두견새 우는 사연이 중요한 이유다. 그것이 꽃으로 갚음하는 남도 처녀총각들의 꼬까비 심상이요 거짓이 아닌 참꽃의 의미망이며 두견새가 피를 토해 물들였던 진달래꽃의 원천일 것이기 때문이다.
봄의 전령 진달래, 그 슬픈 기억의 소환중에서
4월 진달래를 보면 항상 떠오르는 그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