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생각해 봅니다

1.
27일 저녁 평소보다 이른 퇴근입니다. 주말 아내와 둘째딸은 계모임이 주최하는 여행을 간다고 바쁩니다. 큰딸은 스마트폰을 살 생각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립니다. 저는 부모님이 보는 신문을 꺼내올렸습니다. 이런저런 기사를 읽던중 두개의 기사가 눈에 들어옵니다.

정민선생의 ‘세설신어’는 말과 침목사이의 오묘함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려운 글은 아니더라도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처럼 어떤 말보다 침묵으로 자기 주장을 더 강하게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위징은 당 태종 이세민에게 직언을 하여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열었습니다.

바로 옆면에 강릉사투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표준어때문에 사라져 가는 지역 사투리중 강릉 사투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말이나 글에서도 권력관계는 존재합니다. 표준어라 함은 특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한 권력집단이 만든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정한 계층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표준어가 중요하지만 표준어는 또다른 지방의 표준어인 사투리를 말살하는 역할을 합니다. 언어정책이 표준어장려책이기때문입니다.? 언어의 다양성을 고민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2.
먼저 정민의 세설신어중 어묵찬금((語嘿囋噤). ‘말하고 말하지 않고 답하지 않고 수다떨고’라는 뜻인 한 글입니다.

세상사 복잡하다 보니 말과 침묵 사이가 궁금하다. 침묵하자니 속에서 열불이 나고,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 신흠(申欽·1566~1628)이 말한다. “마땅히 말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잘못이다. 의당 침묵해야 할 자리에서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반드시 말해야 할 때 말하고,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해야만 군자일 것이다(當語而?者非也, 當?而語者非也. 必也當語而語, 當?而?, 其惟君子乎).” 군자란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잘 분간할 줄 아는 사람이다. 말해야 할 자리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로 있다가, 나와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으면 소인이다.

이항로(李恒老·1792~1868)가 말했다. “말해야 할 때 말하는 것은 진실로 굳센 자만이 능히 한다.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대단히 굳센 자가 아니면 능히 하지 못한다(當言而言, 固强者能之. 當默而默, 非至强不能也).” 굳이 말한다면 침묵 쪽이 더 어렵다는 얘기다. 조현기(趙顯期· 1634~1685)도 “말해야 할 때 말하면 그 말이 옥으로 만든 홀(笏)과 같고,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면, 그 침묵이 아득한 하늘과 같다(當語而語, 其語如圭璋. 當?而?, 其?如玄天)”고 했다.

공자가 말했다. “함께 말할 만한데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고, 더불어 말할 만하지 않은데 말하면 말을 잃는다(可與言而不與之言, 失人. 不可與言而與之言, 失言).” 할 말만 하고, 공연한 말은 말라는 뜻이다. ‘맹자'”진심(盡心)” 하에는 이렇게 적었다. “선비가 말해서는 안 될 때 말하는 것은 말로 무언가를 취하려는 것이다.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낚으려는 것이다(未可以言而言, 是以言?之也. 可以言而不言, 是以不言?之也).” 꿍꿍이속이 있을 때 사람들은 말과 침묵을 반대로 한다.

김매순(金邁淳·1776~1840)의 말이다. “물었는데 대답을 다하지 않는 것을 함구[?]라 하고, 묻지 않았는데도 내 말을 다해주는 것은 수다[?]라 한다. 함구하면 세상과 끊어지고, 말이 많으면 자신을 잃고 만다(問而不盡吾辭, 其名曰?, 不問而惟吾辭之盡, 其名曰 . ?則絶物, 則失己).” 정경세(鄭經世·1563~1633)는 호를 일묵(一默)으로 썼다. 쓸데없는 말 만 마디를 하느니 차라리 내처 침묵하겠다는 뜻에서였다. 하지만 침묵만이 능사가 아니다.
바른 처신이 어렵다. 말과 침묵, 둘 사이의 엇갈림이 참 미묘하다.

쉽지 않은 글입니다. 한자때문만은 아닙니다. 문장 하나를 내 것으로 만들기 힘듭니다.

3.
다음은 어느 지방 사투리일까요? 여러분 마커 방굽소야, 날이 데우 따땃해졌잖소(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날씨가 아주 따뜻해졌습니다)가 소개한 강릉 사투리입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여러분 마커 방굽소야. 날이 데우 마이 따땃해졌잖소(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날씨가 아주 많이 따뜻해졌습니다).” 올봄에 그 아전매루 달르게 날궂이 마이 하구 지질거렌데요. 그 나불에 영껭이불인 봄불 걱정으 요항 들구 말구랬지요(올봄엔 예년과 달리 비가 많이 왔는데요. 덕분에 산불 걱정을 많이 덜었습니다).”

‘우떠 여서 이러 만내는과(어떻게 여기서 이렇게 만나느냐). 아이구 자내잔가. 이 눈찔에 어레 왔과(아이구 자네 아닌가. 이 눈길에 어떻게 왔느냐). 그 말이 한 개두 안 틀리는 같으과(그 말이 하나도 안 틀리는 것 같다).’

‘우리 하르버이는 우떠 그러 재미동지거 읎는지(우리 남편은 어째 그렇게 재미가 없는지)’

이런 시도 있습니다. 김영량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강릉 사투리로 옮긴 시입니다.

목단이 벙글기까정은
내는 상구 내 봄으 지달리구 있을 기래요
목단이 뚝뚝 뜰어져베린날
내는 그적새서야 봄으 야운 스룸에 택자바리 괼기래요
오월 워느날 그 할루 뒈지게 덥던 날
뜰어져 든논 꽃잎파구마주 휘줄구레해버리구는
오랍덜에 목단은 꽁 고 먹은 자리매루 웂어지구
뻗체오르던 내 보람 서운하게 와르르했느니
목단이 지구 말문 그뿐 내 한해는 마커 내빼구말아
삼백예순날 줄고지 우전해 찔찔 짜잖소
목단이 벙글기까정은
내는 상구 지달리구 있을 기래요, 매른 웂는 슬픔의 봄으
윤동주 ‘서시’를 강릉 사투리로 읊어봤더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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