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1.
연말연시 책 하나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꼭 읽어야한다는 의무감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요구한 책입니다.

“노란 화살표방향으로 걸었다”

소설가 서영은씨가 산티아고를 다녀와서 쓴 순례기입니다.

살다 보면 가끔 운명적인 책이 있습니다. 운명? 몸과 마음으로 책을 읽는 그런 책입니다. 몇 년전 비슷한 책이 하나 있었습니다. 더운 여름에 책은 읽히지 않았습니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책을 손에 집었습니다.

“나는 걷는다”

그 때 읽었던 느낌이 강해서 몇 년후 다음과 같은 글을 썼었습니다.

우리 나이로 환갑이 넘은 나이에 고대실크로드를 걸어서 횡단할 생각을 한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쓴 책입니다. 걸으면서 세계와 인간과 나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인생의 끝에 이룬 새로운 도전이 너무나도 아름답지 않은가요? ? 태어날 때 혼자였던 사람이 살면서 세상과 인간과 만나면서 ‘나’를 찾아가는 긴 시간여행. 그것이 인생일 겁니다.

“나는 다만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굴복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가야만 했다. 살아 있는 한, 인간은 가야 하니까.” (‘나는 걷는다”중에서)

그래서 먼 훗날 언젠가 실크로드든 체가 달렸던 그 길이든 걷고 싶습니다…

2.
서영은.

워낙 소설을 읽지 않아서 노래 잘 하는 서영은씨만 기억합니다. 누군지 모르고 읽기 시작했습니다.나이는 오십대중반, 직업은 소설가이면서 각종 문학상의 단골 심사위원. 여기까지는 평범합니다. 순례를 통해 드러난 작가의 이력은 훨씬 복잡합니다.

이십대중반 만난 김동리선생님이 인생의 첫 남자. 그 후로 오랫동안 김동리선생과 직간접으로 관계되었고 손소희씨가 세상을 떠난 후 김동리선생과 결혼을 합니다. 아마 이 때문에 수많은 관계와 관계가 인생에 깊은 줄음을 만들었고 말할 수 없는 깊은 아픔을 가진 듯 합니다.

김동리에게 나는 세번째 아내이지만 나에게 그는 지나갈 남자인 것이다. 나의 부모님, 형제자매 또한 이세상 하나뿐인 인연이지만, 그 기막힌 인연도 나에게 지나갈 인연인 것이다. 마지막 길을 가시는 어미니를 위해서도 눈물을 참아온 것은, 내게는 눈물이 인연을 끊는 칼이기때문이다. 인연을 위해 우는 것은 내게는 단 한번이어야 했다. (본문 287쪽중에서)

나는 김동리란 거물의 온간 것들, 그의 갈증, 외로움, 정염, 모순, 인색함 등 온간 인간적인 것들을 붙잡고 씨름해온 사람이다. (본문 367쪽 중에서 )

산티아고로 유서를 써놓고 떠나도록 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또한 자신의 변화도 필요하였고.

독신생활을 오래해온 나에겐 공동체생활의 규칙이 볼편하고 속박감이 싫지만, 그것에 두말없이 복종하는 태도를 익히는 것도 이 길을 거는 목표중에 하나이디다..(본문 126쪽 중에서)

“노란 화살표방향으로 걸었다”는 산티아고로 가는 길속에서 만난 영적인 체험으로 가득합니다. 작가는 그것을 기독교라는 교리속의 하나님과 예수님으로 묘사했습니다. 종교가 없는 저로써는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작가가 만남 하나님과 예수님을 ‘내안의 목소리’, ‘무의식속에 감춰 두었지만 길위의 묵상을 통해 발견한 또다른 나’라고 생각합니다.

3.
작가가 그린 산티아고 가는 길은 인간의 삶 그 자체입니다. 변화무쌍 자연속에서 인간이 느낀 두려움, 외로움, 살려고 하는 의지. 다 같은 알베르게(Albergue)지만 누군가에 따라 달라지는 알베르게. 같은 길을 걸어가지만 너무나도 다른 치타. 또다른 순례자들.

?길위에서 노란색 화살표로 산티아고 가는 방향을 찾습니다.
이 산길에서 길을 안내하는 표시들은, 그것들을 표시하기 위해 봉사자들 자신이 고통스런 체험에 동참하면서 뒷사람을 위해 남긴 것이어서 그 자체가 헌신의 서약이었다.(본문 99쪽중에서)

그렇지만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만난 노란 화살표는 다 같지 않습니다. 신자도 다같은 신자가 아니고 헌신도 다 같은 헌신이 아니듯이.

작가는 길위에서 만난 온갖 체험속에서 종교적인 의미를 찾습니다. 성경속 말씀이 길위에서 나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작가는 이런 말을 합니다.

산티아고는 길이며 숲이고 낙엽이며 바람이다.
길과 숲과 낙엽과 바람이 성당이다.

그렇다고 ‘노란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를 종교적인 순례기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누구나 혼자 걷다보면 깊은 생각을 합니다. 나를 되돌아 봅니다. 걷기가 고행이면 더욱더 맨몸으로의 나를 생각합니다. 나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 같을 수 없습니다.

산티아고를 스님이 걸으면 해탈로 이르는 길이고 수사가 걸으면 하나님에 이르는 길일 뿐입니다.

4.
길을 인생이라고 합니다. 작가는 길위에서 느낀 단상을 다양히 표현합니다.

앞서가는 그녀의 모습이 점처럼 작게 보였다. ‘내 뒷에서 누가 따라온다면 나도 저렇게 보이겠지, 인간이란 저토론 작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데…그래도 내 짐하는 죽자고 들고가네.(본문 ?101쪽중에서)

“이제 너는 동행에 의지하지 말고 혼자 걸어라.”나는 길을 잃고 헤맨 것이 아니었다. 노란 화살표를 찾지 못해 순례자의 길을 벗어났을 뿐이다. 어떤 점에서 푹풍뒤에 찾아온 그 깨달음은 나 자신이 화살표가 되어 산티아고로 찾아가라는 메시지인 것이다.(본문 151쪽 중에서)

작품의 제목은 ‘I am enough’였다. 이 작품은 참으로 오묘하다. 모든 존재의 존재 됨의 첫번째 동사는 ‘have(가지다)’가 아니라 ‘be(스스로 있다)’임을 나타내고 있다.(본문 226쪽 중에서)

또한 걷기의 매력도 너무 잘 보여줍니다.

한걸음 한걸음이 수고이면서 동시에 기쁨이 되는 것이 걷기이다. 다리가 수고하면 가슴에는 기쁨이란 이슬이 맺힌다. 머물러 있는 자의 시야는 정지되어 있다. 그는 풍경을 바라보지만, 그 바라봄은 피동적인 것이어서 풍경의 겉면만 보게 된다. 걷는 자는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새로운 풍경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바라봄을 스스로 만들어낸다.대상이 거기 있어 보는 것이 아니라, 한 거름이 나아감으로써 풍경속에 뛰어들어 풍경 전체를 살아 있는 무대로 만든다.(본문 126쪽 중에서)

오늘도 비와 함께 길을 떠났다. 채 마르지 않은 양말과 축축한 옷을 다시 입고 빗속으로 들어서는 순간, 우비에 툭 떨어지는 첫번째 빗방울 소리는 빗소리가 아니라 하늘에서 음표하나가 떨어저 ‘돗’나 ‘파’의 음을 내는 소리로 들린다. 연이어 빗방울은 박자와 고저를 맞추는 듯이 툭툭, 투–욱, 하며 ‘나’라는 건반을 치기 시작한다. 나에게서 시작된 비의 연주는 몇 발짝 걷다 보면 천지간의 모든 물체로부터 제각각의 소리를 이끌어내 내고 그 소리들이 어울리며 마치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심포니 같은 화음을 만들어낸다.(본문 182쪽 중에서)

노란색 화살표를 따라간 길. 나를 찾는 길이지 않을까 합니다. 산티아고가 목적지가 아니라 내가 새로운 시작하는 출발지입니다. 작가의 인생은 아마도 산티아고 이전과 이후로 나뉘지 않을까요?

나는 아쉬운 마음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얼마쯤 가다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거기에 우리가 앉아 있던 흔적은 벤치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가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있었다.참으로 오묘하다. 우리가 시간을 보낸 흔적 모두가 보이는 세계에 남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에 축적된다는 것이…(본문 224쪽 중에서)

노란색 화살표 표시는 많은 길중에서 그 길을 구별하기도 하지만, 방향이 길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의 길에서 또 하나의 길로 이어갈 때, 앞의 하나의 길은 이미 안내를 받은 길이고, 뒤의 길은 수많은 길 중에서 이제부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길이다. 노란 화살표는 선택이 이미 내포된 방향이다.(본문 309쪽 중에서)

인생에서 절벽과의 만남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것 같은 상황 – 질병, 파산, 실연, 명예나 권력의 실추 같은, 묵숨만큼 귀하게 여기던 것을 상실하게 되는 일 – 은 누구에게나 항용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과의 대면이 곧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본문 313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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