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지명찰(天地明察). 일본 에도 막부시대 독자적인 역법을 만들었던 무사의 이야기입니다. 원작은 우부카타 토우(冲方丁)가 지은 ‘천지명찰(天地明察)’입니다.
소설은 읽지 않아서 모르지만 영화는 당의 선명력, 명의 대통력, 원의 수시력 및 주인공인 만든 야마토력이 일식,월식이 예상한 일시를 놓고 진검승부를 하는 방식으로 전개합니다. 역법을 검증하기 위하여 일본의 전통적인 수리(산법)와 천측을 보여주는데 새롭습니다. 특히 북극출지를 전국 방방 곡곡을 다니며 측정하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북극출지(北極出地) 또는 북극고도(北極高度)는 지면에서 북극성을 바라본 각도(북극성에서 오는 별빛과 지면이 이루는 각도)로 오늘날 위도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일본의 산술(算術)이 등장합니다. 산술을 가르치는 곳이 산당이고 산술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산술가입니다. 영화에 나오는 산술 문제입니다.
영화에는 산술의 천재로 세키 다카카즈(関孝和)가 등장합니다. 실족 인물로 일본의 독자적인 ‘와산(和算)’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산술의 성인(算聖)’으로 칭송받는 분이라고 합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야스이 산테츠가 만든 역법이 일본 최초의 독자적인 역법인 정향력(貞享曆)입니다.
2.
영화를 선택한 이유도 그렇고, 영화를 보는 동안, 영화가 끝난 이후 세종시대 만들었던 한반도 독자적인 역법에 대한 소설이나 영화가 왜 없을까? 이런 의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17세기는 태평성대입니다. 경제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하여 과학기술 및 문화에 대한 요구가 넘쳤을 듯 합니다. 조선시대 이와 비슷한 때가 세종 시대입니다. 아래는 세종이 칠정산을 만든 배경과 결과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중국의 역법을 빌려쓰고 있었는데, 계절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농업에 중국의 역법을 그대로 이용하는 데에는 문제점이 많았다. 이에 따라 농업 생산 증대를 위해 우리 나라 자체의 역법을 연구하려는 노력을 경주한 결과 1442년에 중국과 아라비아의 역법을 참조하여 우리 실정에 맞는 새로운 역법서인 칠정산 내·외편을 펴냈다. 칠정산 내편은 원의 수시력과 명의 대통력에 간의대를 설치하여 천문 관측한 자료를 참작하여 편찬한 책으로, 1년의 길이를 365.2425일, 한 달의 길이를 29.530593일로 계산하고 있을 정도로 매우 정밀하게 되어있다.
칠정산 외편은 아라비아의 역법인 회회력을 연구하여 해설한 책으로, 15세기의 조선 천문학의 이론 속에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체계를 중심으로 한 이론이 도입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칠정산의 정산은 ‘일곱 개의 움직이는 별을 계산한다’는 뜻입니다. 일곱 개의 별은 오늘날의 각 요일을 대표하는 일곱 개의 천체 즉 해와 달, 그리고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을 가리킵니다. 별과 행성의 운행, 위치를 살핀 결과를 놓고 일식, 월식은 물론이고 날짜와 계절의 변화 등을 미리 예측하였습니다. 칠정산외편을 편찬하신 분은 <칠정산외편>의 편찬자 이순지.김담입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도 천문학자와 과학자가 있었습니다.다만 우리의 관심이 부족할 뿐이죠.
같은 의미를 가진 역법이지만 세종의 지시로 만들어진 칠정산과 역법가의 노력으로 만든 정향력. 제후가 다스리는 영지를 기초로 한 번(藩)이 정치의 토대를 이루어 지방분권이 있었던 에도 시대와 중앙집권이었던 조선 시대는 다른 과정으로 결과를 만듭니다. 이 때문에 다른 상상력이 가능했을 듯 합니다. 그렇지만 ‘한글 창제’를 새롭게 창조한 ‘뿌리깊은 나무’와 같은 작품을 생각하면 전통 과학에 대한 무관심이 더 클 듯 합니다.
아무튼 소설을 소개한 실의의 늪에서 고개를 들고…우부카타 토우 ‘천지명찰(天地明察)’을 보면 아래와 같은 문장이 소설에 나온다고 합니다.
별에는 답이 없다. 결코 거부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천지가 시작됐을 때부터 하늘에 있었고 단지 누군가가 풀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천의(天意)라는 이름의 설문이었다
밤에 달과 별을 바라보고 있으면 묘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서 있는 나는 한 알의 모래알이나 먼지와 같은 존재로 거대한 무언가에 의해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샌가 눈앞에 있는 불안과 걱정이 살며시 가벼워진다.
칠정산을 만든 조선시대의 과학자들도 같은 생각이지 않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