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分心思一分語

어떤 분이 페이스북에 ‘十分心思一分語’이라는 댓글을 남기셨습니다. 무슨 뜻일까? 찾아보니 이태준의 無序錄(무서록)에 있는 수필 ‘일분어(一分語)’에 나오는 글귀이더군요.

십분심사일분어(十分心思一分語)란, 품을 사랑은 가슴이 벅차건만 다 말 못 하는 정경(情景)을 가리킴 인 듯 하다. 이렇듯 다 말 못 하는 사정은 남녀의 정한사(情恨事)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 표현이 모두 그렇지 않은가 느껴진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뜻을 세울 수가 없고, 말을 붙일 수가 없어 꼼짝 못 하는 수가 얼마든지 있다.

나는 문갑 위에 이조(李朝) 때 제기(祭器) 하나를 놓고 무시로 바라본다.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로되, 거미줄처럼 금 간 틈틈이 옛사람들의 생활의 때가 푹 베어있다. 날카롭게 어여 낸 여덟 모의 굽이 우뚝 자리잡은 위에 엷고, 우긋하고, 매끄럽게 연잎처럼 자연스럽게 변두리가 훨쩍 피인 그릇이다. 고려자기같은 비취 빛을 엷게 띠었는데 그 맑음, 담수에서 자란 고기같고, 그 넓음, 하늘이 온통 내려앉아도 능히 다 담을 듯 싶다. 그리고 고요하다. 가끔 옆에서 묻는 이가 있다. 그 그릇이 어디가 그리 좋으냐 함이다. 나는 더러 지금 쓴 것과 같이 수사(修辭)에 힘들여 설명해 본다. 해보면 번번히 안하니만 못하게 부족하다. 내가 이 제기가 가진 정말 좋음을 십분지 일도 건드려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욱 그럴싸한 제환공(齊桓公)과 어떤 노목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한번, 환공(桓公 )이 당상(堂上)에 앉아 글을 읽노라니 정하(庭下)에서 수레를 짜던 늙은 목수가 톱질을 멈추고, 읽으시는 책이 무슨 책이오니까 물었다. 환공이 대답하기를, 옛성인의 책이라 하니, 그럼 대감께서 읽으시는 책도 옛날 어른들의 찌꺼기올시다 그려 한다. 공인(工人)의 말투로 너무 무엄하여 환공이 노기를 띄고, 그게 말인가 성인의 책을 찌꺼기라 하니 찌꺼기가 된 연유를 들어야지 그렇지 못하면 살려두지 않으리라 하였다. 늙은 목수가 자약(自若)하여 아래와 같이 아뢰었다 한다.

저는 목수라 치목(治木)하는 예를 들어 아뢰오리다. 톱질을 해보더라도 느리게 다리면 엇먹고, 급하게 다리면 톱이 박혀 내려 가질 않습니다. 그래 너무 느리지도 너무 급하지도 않게 다리는데 묘리(妙理)가 있습니다만, 그건 손이 익고 마음에 통해서 저만 알고 그렇게 할 뿐이지 말로 형용해 남에게 그대로 시킬 수는 없습니다. 아마 옛적 어른들께서도 정말 전해 주고 싶은 것은 모두 이러해서 품은 채 죽은 줄로 아옵니다.

그렇다면 지금 대감께서 읽으시는 책도 옛사람의 찌꺼기쯤으로 불러 과언이 아닐까 하옵니다.

환공이 물론 턱을 끄덕였으리라 믿거니와 설화(設話)나 문장이나 그것들이 한 묘(妙)의 경지(境地 )의 것을 발표하는 기구(器具 )로는 너무 무능한 것임을 요새와 점점 절실하게 느끼는 바다. 선승(禪僧)들의 불립문자설(不立文字說)에 더욱 일깨워짐이 있다.

저는 읽어보지 못한 책입니다. 그래도 ‘이태준’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얼마전 좋아하는 소설가 김별아씨가 경향신문에 실은 칼럼에서 이태준의 ‘문장강화’를 글감으로 사용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문장에 대한 자의식을 가지고 세계와 나의 관계를 톺아보는 일이다. 글쓰기 안내서의 고전인 <문장 강화>에서 이태준은 “문체란 사회적인 언어를 개인적이게 쓰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중국의 사상가이자 문장가인 후스는 “언어만 있고 사물이 없는 글을 짓지 말 것, 아프지도 않은데 신음하는 글을 짓지 말 것!”을 주장한다. 시인 이성복은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에서 문학은 “절망도(道) 절망군(郡) 절망읍(邑) 절망리(里) 희망에게” 쓰는, 혹은 죽는 날까지 결코 쓸 수 없는 편지임을 밝힌다.

이태준의 글은 살아있습니다. 느낌이 진하게 옵니다. 無序錄에 실린 가을입니다.

지난밤에 찬비를 맞으며 돌아온 우산이다. 아침에 나와 보니 거죽에 조그만 나뭇잎 두엇이 아직 젖은 채 붙어 있다. 아마 문간에 선 대추나무 가지를 스치고 들어온 때문이리라.
그러나 스친다고 나뭇잎이 왜 떨어지랴 하고 보니 벌써 누릇누릇 익은 낙엽이 아닌가!

가을! 젖은 우산이 자리에서 나온 손엔 얼음처럼 찬 아침이다.
뜰에 내려 화단 앞에 서니 화단에도 구석구석에 낙엽이 보인다. 어쩐지 앵두나무가 꺼칠해졌고 살구나무도 끝가장귀들만 푸른 빛이 흔들릴 뿐, 굵은 가지들은 엉성하게 줄거리만 드러났다. 낙엽이 놓여 그런지, 눈에 선뜻 화단도 파리해졌다. 틈틈이 올려 솟는 잡초를 거의 날마다 한 웅큼씩 뽑아 주었는데 그것을 잊은 지 며칠 동안 화단은 상큼하니 야웨졌구나!
우썩우썩 자라던 힘이 한밤에 정지한 듯, 빛낡은 꽃송이들은 씨를 물고 수그렸고 살내린 가지 및에는 벌레 소리만 어지럽다.

과꽃과 코스모스가 아직 앞날을 보이나, 그들의 꽃은 워낙 가을 손님, 추풍(秋風)과 함께 설렁설렁 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잠깐이려니 생각하면 가을꽃의 신세는 피기도 전에 서글프다.
오래 볼 것이 무엇인가?화단을 아무리 둘러보아야 눈에 머무름이 없다. 어느새 웅긋줄긋 올려솟는 것은 단을 모은 돌멩이밖에.

돌! 나는 다시 마루로 올라와 아침 찬비에 젖는 잡석(雜石)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좀더 돌에 애착하지 못했던 것이 적이 부끄러워도 진다.
동양화에 석수도(石壽圖)가 생각난다. 또 동양의 선비들이 돌석(石)자를 사랑하여 호(號)에까지 흔히 석자를 가진 것도 생각난다.
그것은 돌의 그 묵직하고 편안하고 항구한 성품을 동경한 때문이리라. 생각하면 돌은 동양인의 놀라운 발견이다. 돌을 그리고 돌을 바라 보고 이름까지 즐겨 돌로 부른 동양 예술가들의 심경은, 찰나적인 육체에 붙들린 서양인의 그것에 비겨 얼마나 차이 있는 존경할 것이리오!
돌!

가을 아침 우연히 비맞는 잡석을 보며 돌을 사랑한 우리 선인들의 청담고박(淸談枯朴)한 심경을 사모하다.

책을 다룬 또다른 수필, 책입니다. 아 가을, 無序錄을 처음부터 읽어보려고 합니다.

책(冊)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 ‘책’보다 ‘冊’이 더 아름답고 더 ‘책’답다.
책은, 읽는 것인가? 보는 것인가? 어루만지는 것인가? 하면 다 되는 것이 책이다. 책은 읽기만 하는 것이라면 그건 책에게 너무 가혹하고 원시적인 평가다. 의복이나 주택은 보온만을 위한 세기는 벌써 아니다. 육체를 위해서도 이미 그렇거든 하물며 감정의, 정신의, 사상의 의복이요 주택인 책에 있어서랴! 책은 한껏 아름다워라. 그대는 인공으로 된 모든 문화물 가운데 꽃이요 천사요 또한 제왕이기 때문이다.

물질 이상인 것이 책이다. 한 표정 고운 소녀와 같이, 한 그윽한 눈매를 보이는 젊은 미망인처럼 매력은 가지가지다. 신간란에서 새로 뽑을 수 있는 잉크 냄새 새로운 것은, 소려라고 해서 어찌 다 그다지 신선하고 상냥스러우랴! 고서점에서 먼지를 털고 겨드랑 땀내 같은 것을 풍기는 것들은 자못 미망인다운 함축미인 것이다.

서점에서 나는 늘 급진파다.우선 소유하고 본다. 정류장에 나와 포장지를 끄르고 전차에 올라 첫페이지를 읽어보는 맛, 전찻길이 멀수록 복되다. 집에 갖다 한번 그들 사이에 던져버리는 날은 그제는 잠이나 오지 않는 라 밤에야 그의 존재를 깨닫는 심히 박정한 주인이 된다.

가끔 책을 빌리러 오는 친구가 있다. 나는 적이 질투를 느낀다. 흔히는 첫 한두 페이지밖에는 읽지 못하고 둔 책이기 때문이다. 그가 나에게 속삭여 주려던 아름다운 긴 이야기를 다른 사나이에게 먼저 해버리기 때문이다. 가면 여러 날 뒤에, 나는 아주 까맣게 잊어버렸을 때 그는 한껏 피로해져서 초라해져서 돌아오는 것이다. 친구는 고맙다는 말만으로 물러가지 않고 그를 평가까지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경우에 그 책에 대하여는 전혀 흥미를 잃어버리는 수가 많다.

빌려 나간 책은 영원히 ‘노라’가 되어버리는 것도 있다.이러는 나도 남의 책을 가끔 빌려온다. 약속한 기간을 넘긴 것도 몇 권 있다. 그러기에 책은 빌리는 사람도 도적이요 빌려주는 사람도 도적이란 서적 논리가 따로 있는 것이다. 일생에 천 권을 빌려보고 999권을 돌려보내고 죽는다면 그는 최우등의 성적이다. 그러나 남은 한 권 때문에 도적은 도적이다. 책을 남에게 빌려만 주고 저는 남의 것을 한 권도 빌리지 않기란 천 권에서 999권을 돌려 보내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빌리는 자나 빌려주는 자나 책에 있어서는 다 도적됨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책은 역시 빌려야 한다. 진리와 예술을 감금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책은 물질 이상이다. 영양(令孃)이나 귀부인을 초대한 듯 결코 땀이나 때가 묻은 손을 대어서는 실례다. 책은 세수를 할 줄 모르는 미인이다.

책에만은 나는 봉건적인 여성관이다. 너무 건강해선 무거워 안 된다. 가볍고 얄팍하고 뚜껑도 예전 능화지처럼 부드러워 한 손에 말아 쥐고 누워서도 읽기 좋기를 탐낸다. 그러나 덮어놓으면 떠들리거나 구김살이 잡히지 않고 이내 고요히 제 태로 돌아가는 인종이 있기를 바란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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