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자 이전의 ‘나’

‘그대안의 작은 호수’는 처음 넥스트웨어를 설립할 때부터 지금까지 기록뿐 아니라 단상을 담고 있습니다. ‘망한 기업가’가 망한 기업을 정리하고자 시작한 블로그이지만 살아가는 과정이 그렇듯 하나둘씩 내 사고의 흐름을 하나씩 둘씩 기록한 일기장이 되었습니다.

소원중의 하나가 ‘소박한 자서전’을 하나 쓰는 일이지만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기억이 있을 때 하나둘씩 기록으로 남길까 합니다. 이 글은 97년이전까지 기록입니다. 짧은 기록.

1.
62년생입니다. 태어난 곳은 경북이지만 자란 곳은 서울입니다. 부모님 모두 경북에서 나고 자라서 지역감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특히 DJ와 노무현이 집권한 지난 10년동안? 서로 정치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부모 자식관계가 정치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관은 없지만 대화의 폭이 좁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영등포시장에서 봉투를 파셨고 물론 요즘말로 어머니와 맞벌이였습니다. 새벽에 나가서 24시가 다되어 들어오십니다. 경상도에 완고한 성격을 가지신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맞기도 많이 맞았습니다.(^^;) 자식들이 공부를 잘해 출세하여야 한다는 대한민국 누구나?가지고 있는 생각을 가지셨지만 당신에 엄격하고 항상 성실하신 면을 가지셨기에 서울에 상경하여 나름 성공을 하였고 자식을
키워내셨습니다. 다만 저와 대화가 거의 없는 편이긴 하지만……

서울에서 영중국민학교, 여의도중학교, 여의도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여의도라는 말을 들으면? 남들이 오해합니다. 집안이 잘사는 줄(^^). 입학할 때만 해도 여의도가 막 개발을 시작하던 때라 학교의 정원을 채우기 힘들어 주변에서 학생을 받았습니다. 저는 영등포에서 추첨으로 입학한 경우입니다.
‘여의도’라는 지역의 특성상 학생들사이에 가로놓였던 장벽은? 별로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의식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전두환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실세들의 자식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느끼지 못했습니다. 최소한 무시당하지는 말자는 생각을 하였기때문에 ‘공부’하나만 하였습니다. 장사를 하셨던 부모님도 원하였고 저도 재미있고 해서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였습니다.

2.
대학은 81년에 제어계측공학과에 입학은 했지만 슬프게도 졸업은 하지 못했습니다. 대학시절 운명의 추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후 인문학(역사,철학)에 관심을 가졌다가 가입한 동아리인 ‘고전연구회’때문입니다. 예전말로 하면?’이념서클’입니다. 초기에는 진짜 고전을 강독했지만 70년대 후반학번부터 맑시즘과 관련된 고전(?)을 많이 읽었죠.

이념서클이 학생을 의식화한다고 하였습니다. 맞습니다. 그렇지만 자발적인 의식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의식화로 나아가게 하였을까? 아마도 눈앞에 벌어진 현실에서 느꼈던 크고 작은 분노들이 무언가 행동을 요구하였고 행동을 하려면 나름의 가치체계가 필요하였습니다. 이때문에? 사회에서 금기하는 가치를 받아들였고 이를 사회에선 ‘의식화’라고 불렀습니다.

이 때 읽었던 책중 감명이 깊었던 책은 務臺理作이 쓴 ‘현대의 휴머니즘’입니다. 현대의 휴머니즘은 독점에 의해 소외된 노동자와 농민에 태도를 강조하였습니다. 또하나는 요즘 번역된 폴 스위지의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입니다. 이후? 사물을 바라볼 때 꼭 역사적 관점을 견지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흐름을 통해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이해하여 앞으로 어떻게 나갈지를 밝히는 지적 태도를 익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 재미있는 점이 있습니다.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던 친구가 있습니다. 지금은 신부님입니다.

3.
84년 1학기와 2학기때 학원민주화관련 활동을 하다가 85년 1월에 제적이 되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졸업을 한 달 남기고 제적을 하더군요. ?중간에 한번 복학을 했지만 결국 학교를 가지 않았습니다. ?최종학력은 고졸입니다.넥스트웨어시절에는 유일하게 저 혼자만 고졸자라고 직원들에게 농담을 하곤 했습니다. 사실 이 때문에 불편한 적은 없었습니다만 잠깐 졸업장때문에 고민을 한 적은 있었습니다. 부모님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MBA과정을 다니려해도 학사학위가 필요해서. 아무튼 업보입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세상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무슨 자격증같은 것을 “딸 수 있을 때 따라”고 합니다.

84년 2학기때 어머니는 같이 활동했던 동료들 사이에서 유명했습니다. 저를 찾으러 매일같이 대학교로 나오셨고 그래서 동료들이 다 얼굴을 알았습니다. 아마도 이 일이후? 혈압이 높아지셨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항상 마음의 짐입니다. 마음의 짐은 84년 12월 85년으로 예정되어 있던 총선투쟁을 뒤로 하고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합니다. 이 때부터 45일 정도 일본 오사카 큰아버지집에 머뭅니다.? 오사카와 토쿄을 오가면서 많이 다녔습니다. 토쿄에 있는 대학가에서 시위를 하는 학생들을 자주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고립된 모습이었습니다. 다가서서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주변은 그들에 무관심하였습니다. 일본에서 사상이 자유롭다는 사실은 서점과 도서관에서 알았습니다. 천왕사근처에 있는 시립도서관에 자주 나갔습니다. 마르크스와 레닌 전집(청목서점, 문고판)이 쫙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김일성전집도 마찬가지입니다.

85년 귀국했을 때는 아무도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현역으로 입대하는 것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논산으로 향하는 입영버스를 혼자 타고 내려갔습니다. 우울할 것도 슬플 것도 없는 그저 평범한 입영입니다. 훈련을 받고 원주를 거쳐 강원도 간성, 연대 본부에 있다가 대대로 배치받았습니다. 본부중대 통신소대 무선병(320)입니다. ?자대 배치를 받고 도착한 막사는 한가했습니다. ?이유인 즉, 모두 전방에 철책선 이중화공사를 한다고 올라갔다고 합니다. 군기든 상태로 몇 일을 지내던 중 한밤중에 ‘완전군장, 집합’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고참병들의 술이 화근입니다. 대대장이 막사로 내려왔다 아무도 불침번을 서지 않는 바람에 발각되어 공사장으로 교체투입하기로 한 명령입니다. 비 오는 날 생쥐마냥 비를 맞고 전방에 도착하였습니다. 도착했다고 끝이 아닙니다. 술도 먹지 않았는데 군기교육대에 편입되어 한 주동안 군기교육을 받았습니다. 역시 군대도 줄입니다.(^^) ?군대공사는 기계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남는게 노동력이라고 몸으로 다 때웁니다. 철책선 공사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모래와 자갈같은 자재를 계곡아래까지 운반할 방법이 병력밖에 없습니다. 몇 백 계단을 오르 내리기 두번, 그러면 점심시간입니다. ?녹화사업때문에 속초 보안대에 끌러가서 취조도 당해보고, 선임하사가 불시에 사물함을 뒤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감시대상이죠.이렇게 세월은 흘러갑니다.

87년에 군대를 제대했습니다. 22사단 – 동해안의 간성과 까치봉에서 통신병으로 근무하였습니다.? 군대에 가서 고생을 많이 했죠. 물론 다른 남자분들과 다른 점이 없습니다. 다만 천재지변이 무엇인지는 뼈저리게 경험하고 왔습니다. 수해가 나 철책선이 무너져? 사람이 죽었고 산불이 나서? 진화하러 나섰는데? 강풍이 부는 가운데 산 정상에 고립되어 살려고(^^) 막 하산한 경험도 있었습니다.? 한겨울 전방에서 근무를 할 때? 눈이 2미터정도 쌓여서 초소근무를 하러 헤엄치면서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기억에 나는 것은 겨울내내 전방에서 보급품을 받으려고 매일 눈을 치우느라 허리가 끊어지는듯한 경험입니다.

육군 병장으로 제대를 했고 87년에는 문래동에 있는 공장에서 선반공으로 일했습니다. 87년 6월항쟁이 끝날 무렵 제대를 하고 무엇을 할지 고민을 하였습니다. 특별히 상의할 선배가 없었지만 그냥 공장에 가야한다고 생각해서 대학동아리 동기와 문래동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때까지 부모님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것으로 굳게 믿고 계셨는데 가출하듯이 집을 나와 문래동에서 자취를 하였습니다.

4.
사실 저는 공장에서 일하지만 먹물냄새가 아주 진하게 납니다. 그 시절엔 성격도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사람들과 쉽게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고민을 하다 88년후반에 공장을 나와서 서울노동운동단체협의회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이 때 유명한 88년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를 조직할 때 같이 있었습니다. 이 때 일했던 분들이 요즘 민주노총이나 민노당, 진보신당에서 일하는 분들이죠. 이재오씨나 김문수씨 같이 후에 민중당을 거쳐 한나라당에 있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이 때까지 나를 움직인 힘은 나의 판단도 있었지만 시대의 흐름이 일정정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대학에서 이념서클에 가입한 것이나 제대후 공장에 들어간 것이나 “미래에 대한 명확한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한 행동이냐”라고 물어보면 솔직히 느낌표입니다. “현재 이자리에 내가 생각하는 대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는 정도의 생각이 있었습니다. ?물론 정치권력을 통하여 현실을 변화하자는 생각을 아주 강하게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중 많은 이가 정치공간에 뛰어들지 않았나 합니다. 변호사를 통한 우회로를 거친 분들도 많습니다.

90년쯤에 전국노운협-서울노운협이라는 노동운동단체들의 협의회기능이 상실되면서 90년에 구로동에서 서울노동운동연구소를 몇몇 동료들과 함께 만들었습니다.? 시대적으로 ‘노동운동의 과학화’라는 화두가 유행하였고 곳곳에서 ‘연구소’라는 이름의 단체들이 생기고 있었습니다.? 이 때 만든 자료중의 하나가 ‘소사장제’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소사장제 근로조건 악화유발”(노동현장)

[한겨레] 1992-07-01 12면? 사회 ?서울노동운동연구소 세미나서 지적/경영권 참가없어 노동강도만 강화/노조
무력화시켜 고용불안도 초래최근 중소제조업체를 중심으로 ‘소사장제’가 확산되면서 사업주와 노동자들 사이에 이 제도의 도입에 대한 찬반논의가?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무역협회 등에서는 소사장제가생산성 향상, 인력절감, 산업기반의 확대·강화 등의 측면에서 긍정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보고 당국에 세제상의 지원과 관련 노동법의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노동계쪽에서는 이 제도가 장기적으로는 노동강도를 높이고 노동조합의 단결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며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26일 오후 서울노동운동연구소 주최로 열린 ‘소사장제와 노동조합의 대응’이라는 세미나에서는 이 제도가 장기적으로는 생산성 향상과 임금문제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끌었다.

이 연구소 상임연구원 정병진씨는 ‘소사장제의 도입배경과 성격’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소사장제를 산업구조 조정에 따른 ‘신경영전략’의 하나로 파악했다.

정씨에 따르면 신경영전략은 △경쟁력 강화를 위해 인사·노무관리를 혁신하고 △기업조직을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운영하도록 하는 한편 △87년 이전과는 달리 물리적 통제만이 아니라 물질적 보상을 가미한 선별적 탄압 등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전략에 따른 경영방식 혁신 사례로는 △사내벤처제도 △사내 독립채산제 △퇴직사원 협력업체 △부서 독립회사 등의 형태가 있으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사장제도라는 게 정씨의 주장이다.

소사장제가 노동조합·노동운동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이 연구소의 김형준씨는 “이 제도가 노조의 무력화 또는 해산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고용불안의 심화와 근로조건의 악화를 가져온다”고 지적했다.더구나 도급노동이라는 특수성을 빌미로 사업주들이 △근무처의 임의 변경 △잔업수당의 폐지 △퇴직금의 폐지 등을 요구하고?있어 커다란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이공순 기자>

이 때 역사의 흐름이 급격히 변합니다.바로 소련을 중심으로 사회주의권의 붕괴입니다 스웨덴 노동조합총동맹의 연구소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 이 때 스스로 고민하여 찾았던 길이 정보화라는 화두였습니다.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정보기술을 이용하여 노동운동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자는 취지였습니다. ?연구소를 그만 두고 91년부터 노동운동자료를 DB하기 위한 법인설립을 준비했습니다. 솔직히 이때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떠나고 있었습니다. 이념의 좌절이 원인인지, 삶이 힘들었기때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정치판으로 들어가지 않겠다, 사법고시를 보고 변호사가 되지 않겠다는, 남들이 선택하는 길은 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법인이 노동운동의 과학화, 정보화라는 운동적 과제만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기업’이라는 형식을 취했던 이유는 창업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보고 ‘우리가 알고 있는 기업이 아닌 다른 기업’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92년에 용산에 있는 세종네트워크(대표자가 전대협에 있던 분이라 소개를 받아서)에 2평정도를 임대내서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때 같이 했던 분이 구로동에서 노동운동을 함께 했던 후배입니다. (지금은 한인터넷이라는 회사에서 유닉스개발자로 계십니다….)

처음엔 개발능력이 없어서 외부의 프로그램을 의뢰를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풀빛컴퓨팅의 김종우사장님과 이상길사장님을 알게되었습니다. 특히 이상길사장님과는 이후 BBS운동관련해서 자주 뵙고 조언을 많이 들었습니다.그러다 93년 전후해서 나우콤에 계시던 선배의 도움을 받아서 나우콤 초기 BBS프로그램 개발프로젝트에 참여를 하였습니다. 물론 제가 아니고 제와 같이 일하던 두분의 유닉스개발자가 참여하였습니다. 대용량 유닉스서비스시스템에 대한 핵심적인 기술을 습득하였습니다. 이 때 습득한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PC통신서비스시스템을 개발하였습니다. 이 때의 브랜드가 ‘마음’입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94년쯤부터 “참세상”이라는 BBS를 운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규모 민주·노동 전자게시판 등장[한겨레] 1993-08-21 08면? 경제

김형준씨 개발 ‘참세상 BBS’주목/3천여명 수용 다양한 정보제공/각종 단체 통신망 연결도 추진
대형 컴퓨터통신망처럼 다양한 분야의 정보를 담으면서도 민주·노동 전문 데이타베이스의 특색을 갖는 비교적 큰 규모의 전자게시판(BBS)이 등장했다.

노동정책연구소에서 활동하던 노동운동가 김형준(32)씨는 최근 ‘바른정보’라는 정보통신회사를 차리고 전자게시판 ‘참세상BBS’를 만들었다. 이 전자게시판(접속번호 02­714­8856)은 다음주부터 석달 남짓 전화회선 4회선 규모로 무료 시험서비스를 시작하며 데이타베이스 자료축적 등의 정비를 거쳐 오는 11월께 정식 유료서비스를 할 계획이다.

이 전자게시판은 게시판, 대화실처럼 일반 전자게시판 기능외에 진보적 잡지 기사 제공, 노동운동 관련 소식, 노동정책 데이타베이스 등 노동관련 서비스를 강화하며 민주·노동단체들을 컴퓨터통신망으로 연결하는 네트워크 구성을 추진하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하이텔 등처럼 일반적인 컴퓨터통신 서비스를 하면서도 전문성을 살린 독특한 전자게시판인 것이다.

민주·노동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전자게시판은 기독교인들이 만든 ‘평화만들기’나 대우자동차 노조가 운영하는 ‘대자보’ 등이 있지만 두세 사람만이 동시에 접속할 수 있으며 특수한 성격을 지녀 일반 이용자는 아주 적은 실정이다. 하지만 ‘참세상BBS’는 올해말까지 시설규모를 한꺼번에 32명이 사용하고 최대 3천2백명까지 수용할 만큼 확대할 계획이며, 노동관련 서비스를 중심으로 하기는 하지만 부동산·비디오 정보 등 생활정보도 제공할 예정이다.

앞으로 제공될 주요 내용을 보면 △월간 〈길을 찾는 사람들〉 등 진보적인 잡지들의 기사를 읽을 수 있는 잡지서비스 △출판노조가 제공하는 책 정보 △서울영상집단이 추천하는 ‘좋은 비디오 정보’ △각종 공연안내 △생활정보신문들이 제공하는 부동산·중고품 매매정보 등이 있다. 또 이 회사에서 제작하는 노동법률 관련 데이타베이스를 만들 예정이며 노동정책연구소, 학술단체협의회 등 외부단체에 의뢰해 노동·학술 데이타베이스를 구축할 계획도 세워놓았다. 각종 사회단체, 노조관련 단체들을 연결하는 종합통신망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점도 두드러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김형준씨는 “한국통신의 157번 서비스처럼, 한번의 접속만으로 각종 민주단체들이 제공하는 데이타베이스나 전자게시판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통신망 구성에 중점을 둘 계획”이라며 “전교조나 전국연합 등 대규모 단체의 통신망을 구축해주는 전용선 서비스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첫 단계로 지난해 대통령선거 개표결과 독자집계 등의 활동을 벌인 진보적 과학학생단체인 한국과학기술청년회를 동호회의 형태로 곧 참여시킬 계획이다.

김씨는 “노동운동단체들이 정보 공개를 꺼리는 등 종합적인 통신망 구축에 어려움이 적지 않지만 이들 단체들의 컴퓨터 사용률이 높아 일단 망이 만들어지면 활동을 활발히 벌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적인 통신문화’를 내세운 많은 소규모 전자게시판들이 사회분위기 변화로 차츰 유명무실해지고 있는 때에 등장한 이 전자게시판은, 민주·노동진영이 컴퓨터통신이라는 새로운 활동영역을 개척하려는 본격적인 첫번째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된다.<신기섭 기자>

노동운동의 정보화라는 초기 목표는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런 부분에 관심을 가진 곳도 없었고 가진 곳이라고 하더라도 ‘정보화를 통한 연구’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바른정보는 참세상을 운영하는 기업 – 요즘으로 말하면 사회적 ?기업 – 이면서 정보운동과 관련된 고민을 같이 하는 곳으로 변화하였습니다. 또한 진보적 정보통신운동에 관심있는 여러모임들과 국제연대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국제노동자 정보통신의 ‘연대’[한겨레] 1997-08-27 14면? 정보통신·과학

오는 11월 노동자·진보단체 서울 총집합/정보통신 활용방안을?논의한다하루가 멀다하고 정보통신 전시회와 국제회의가 번갈아가며 개최되는 게 세계 주요 도시의 요즘 풍경이다. 대기업과 벤처기업 등 기술생산업체들이 참여하는 이런 정보통신 행사와 달리, 사회운동에 정보통신 기술을 활용하고 있는 사용자들이 여는 전시회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가운데 오는 11월 서울에서 국제 노동자와 진보사회단체들이 주최하는 정보통신 행사가 열린다.

‘서울국제레이버(노동자)미디어’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이번 행사는 민주노총이 후원하며, 민주금속연맹·노동정책연구소·노동정책정보센터·노동자뉴스제작단 등 노동단체와 민주와 진보를 위한 지식인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등 진보사회단체, 그리고 참세상·정보연대싱 등 통신단체를 비롯해 모두 20여개 단체가 대거 참여한다. 지난해 11월부터 행사 준비를 해온 이들은 지난 25일 행사 조직위원회 준비모임(위원장 김진균 서울대 교수)을 구성하고 본격적인 준비활동에 나섰다.

준비단계부터 참여해온 바른정보 대표 김형준씨는 “인터넷·피시통신 등 정보기술과 비디오 등 영상미디어를 사회변혁에 활용해온 경험을 공유하며 미래 비전을 찾는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라며 “자본쪽 정보통신행사에 대응하는 이런 행사가 미국 등 몇개 나라에선 이미 열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행사에선 ‘노동자, 정보기술 그리고 연대’라는 회의주제와 별도로 행사장 한쪽에 노동운동에서 실제 활용되는 소프트웨어·하드웨어와 인터넷·피시통신 네트워크를 시현하는 전시회도 열 예정이다.

해외 노동운동 활동가의 반응은 꽤 좋은 편이다. 행사 준비단계부터 미국·영국 등 7∼8개 나라의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적극적인 참여 의사를 전해온 상태다. 영국의 진보적인 영화감독 켄 로치도 이번 행사에 큰 관심을 나타내며 방한할 뜻을 전했다고 주최쪽은 밝혔다.

집행위원장에 내정된 노동정책연구소 박석운 소장은 행사와 관련해 “정보통신 기술은 지역과 전국, 그리고 국제적인 노동운동의 연대를 손쉽게 실현해 주고 있다”며 “많은 단체와 조직에서 정보통신행사에 큰 관심을 나타내 앞으로 노동진영의 정보통신 활용방안을 논의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국제레이버미디어는 해마다 또는 격년으로 정기 개최될 계획이다.

노동자의 네트워크 활동사례나 정보통신 국제회의 개최는 지난 90년 국제 노동단체의 정보통신행사로 처음 열린 미국의 ‘레이버테크’ 이래 국제 노동운동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 행사를 주최한 미국의 레이버넷(Labornet)은 미국 내 250개 연맹노조와 국제노동단체를 잇는 이 분야의 대표적 모범사례이다. 지난 7월에 열린 제5회 레이버테크에선 인터넷을 중심으로 라디오·케이블TV·텔레비전·출판물 등 광범위한 미디어 활용의 가능성을 선보였다.

영국의 레이버넷(Labournet), 캐나다 공공노조의 솔리넷도 국내와 국제 연대의 네트워크로 활용되고 있다. 이밖에 과테말라·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의 노동조직도 뉴미디어 정보기술을 잘 활용하는 사례로 꼽히고 있다.

국내에서도 올해초 노동자 총파업 당시 인터넷을 활용해 사상 처음으로 국제 노동자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국내 노동운동권은 주로 피시통신망 안의 통신망인 폐쇄사용자그룹(CUG)을 주로 활용해 왔다. 현재 한국노총·민주노총과 각 노조연맹이 열고 있는 CUG는 대략 10여개에 이른다.

서울 영등포 산업선교회에서 11월10일부터 사흘 동안 열리는 이번 국제행사는 내달께 조직위원회가 출범하면서 공식화한다. 조직위 준비모임은 이번 행사에 동시통역·행사진행 등을 도울 자원봉사자를 모으고 있다. <오철우 기자>

1995년을 전후해서 바른정보는 두가지 성격을 지닌 기업이었습니다. ‘참세상’이라는 네트워크를 운영하며 정보를 통한 운동단체라는 성격 – ?주로 저 개인에 국한된 일이지만 – 증권회사를 위한 트레이딩시스템을 개발판매하는 영리기업입니다. 서로가 서로에 장애가 되는 상황이었고 ?서로 분리하여야 할 때가 점점 다가왔습니다.

이 때 두가지 선택을 하였습니다.

“바른정보가 가진 모든 자산을 진보네트워크센터에 기증하여 진보네트워크센터가 빠른 시일내에 자리잡도록 도와준다”, “나를 포함한 개발자 전원이 풀빛컴퓨팅과 함께 설립하는 넥스트웨어에 참여하여 트레이딩전문 소프트웨어회사를 만든다” 입니다. ?오늘의 나는 이 때 내린 선택의 결과입니다.

앞에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기업’이라는 형식을 취했던 이유는 창업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보고 ‘우리가 알고 있는 기업이 아닌 다른 기업’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 글은 넥스트웨어를 하는 시간동안 질곡으로 작용합니다. 결국 경영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준비없이 목표를 잡아서 ?실패라는 아픔을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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