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7,80년대 대학을 이야기할 때 학생운동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유신과 5공으로 이어지는 독재하에서 저항은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렇지만 학생운동가로서의 저항은 쉽지 않았습니다. 현재와 미래를 놓고 끊임없는 고민과 갈등을 하여야 했습니다. 그런 과정의 끝을 투신(投身)이라 하였습니다. 투신(投身)은 매 순간 미래를 결정하여야 할 때 커다란 결단과 함께 다가옵니다. 저 역시 비슷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구십년대 어느 때, 기업을 하겠다고 거리를 둔 이후 투신(投身)이라는 단어는 머리속에서 잊혀졌습니다.
투신이라는 단어를 다시 들은 것은 이십여년이 지난 후입니다. 천주교 신앙을 갖기 위해 예비신자 교리과정의 마지막. 과천본당 신부님의 특강이 있었습니다. 이 때 신자의 의무로 ‘투신(投身)’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절대적인 존재에 나를 던진다”
다시 들은 투신이라는 말. 이 때 성지순례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예비신자 교리과정중 하나로 서울시내 성지순례가 있었습니다. 이 때 찾았던 곳중 당고개성지가 있었습니다. 제가 본 성당중 가장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 때 봉사자가 소개한 분이 이성례 마리아입니다. 배교와 순교로 이어진 이성례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남편 최경환이 한양을 오가면서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묻어주고 교우들을 돌보자, 마리아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자식들을 보살폈다. 그러던 중 포졸들이 마침내 수리산 교우촌으로 들이닥쳤다. 이때 그녀는 음식을 준비해서 포졸들을 대접한 다음, 남편 일행의 뒤를 따라 어린 자식들과 함께 한양으로 향하였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마리아는 남편이나 다른 자식들과 격리되어 젖먹이 스테파노와 함께 여인들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문초와 형벌을 받아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졌으나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마리아는 이러한 육체적인 고통보다 갓난아기에 대한 모성애 때문에 더 큰 고통을 느껴야만 하였다. 젖은 나오지 않았고, 먹일 것이 없어서 한 살밖에 안 되는 스테파노가 굶어 죽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남편이 매를 맞다가 순교하고, 스테파노가 더러운 감옥 바닥에서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던 그녀는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마리아는 자신의 본래 마음과는 달리 현세적인 구원을 도모하려는 그릇된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내 그녀는 다시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자하심으로 당신 여종의 나약함을 구원해 주시는 은혜를 베푸셨다. 형조에 이르자, 이성례 마리아는 용감한 신자들의 권면으로 큰 용기를 얻게 되었다. 이제 그녀는 이전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쳤고, 재판관 앞으로 나가 전에 한 말을 용감하게 취소하였다. 또 모성애를 비롯하여 모든 유혹을 용감히 이겨냈으며, 막내아들을 하느님께 바친 것을 기뻐하였다. 이 무렵 그녀의 둘째 아들 최의정(야고보)이 한 달 이상 감옥을 오가면서 모친과 신자들의 시중을 들어주었다.
마리아는 관례대로 마지막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감옥으로 찾아온 자식들에게 “형장에는 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자신의 마음이 약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녀는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말아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시복시성 이성례 마리아 (1801~1840년)중에서
저같은 신앙이 깊지 않은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면 가족의 삶을 위해 배교하였고 순교로 가족의 삶을 버렸습니다.
“믿음이 무엇이기에 자신과 가족을 모두 버리고 지켜야 했을까?”
“신앙이란 무엇을 나를 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가?”
성지순례를 마치고 산 책이 김훈선생의 ‘흑산’입니다. 흑산에 등장하는 수많은 죽음은 모두 순교입니다. 이름과 기록이 있어 후대에 성인으로 공경을 받지만 그렇지 않은 이름없는 죽음도 있습니다. 이름없는 죽음은 ‘백성들의 죽음입니다. 이들의 믿음은 삶에 대한 절절한 희망이었습니다. ‘이승과 저승이 다를 바 없는’, ‘살아도 살은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삶을 살았습니다. 죽음은 오히려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는 길입니다.
2.
오늘도 새벽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미사로 진행하였습니다. 미사중 신부님이 짧은 한마디를 하였습니다.
“순교는 신앙의 증거이다”
순교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닙니다. 우리 역사를 놓고 보면 수많은 사례가 있습니다. 먼 옛날로 올라가지 않더라도 일제 식민지아래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던 수많은 열사와 투사를 기억합니다. 그들의 삶이 곧 조국의 독립을 위한 순교입니다. 가까이 보면 전태일이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는 마지막 말속에서 믿음을 담았고 자신의 동료들을 위한 순교입니다. 모두 자신을 던져 믿음을 보였습니다. 믿음이 보편성을 가지면 순교는 뭇 사람들의 공감을 얻습니다. 물론 종교적 자유를 누리고 있는 여기서 순교란 지금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 순간의 순교는 투신이라는 모습으로 보여질 듯 합니다.
. 예수살이 공동체 길벗 사제이신 박대호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네요.
계율을 지키려면 인내와 금기를 지키고, 수칙을 따라야 하는데, 누굴 미워하지 않는 차원이다. 그러나 한 단계 더 나아가 새로운 세계로 들어오도록 초대하는 것은 투신이다. ‘계율의 신앙’은 어느 집단과 스승에게 속하기 위해 ‘이것은 하지 말아야지’하는 것이지만, ‘투신의 신앙’은 이타적 삶이며, 미워하지 않는데서 자기를 열고 사랑하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자신에게 아직 부족한 것을 채워 하느님이 완전하듯이 우리도 완전해지는 것이다.
세례를 받은지 몇 달입니다. 난 또다른 투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