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가 강론….

1.
천주교에 평신도주일이라고 있습니다. 찾아보니까 이런 내력이 있었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매년 연중 제32주일을 평신도주일로 정하고, 전국 각 본당에서 평신도의 강론과 평신도 사도직을 위한 헌금을 실시하도록 배려하고 있다.

1968년 7월 23일 창립총회를 통해 결성된 한국 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당시 명칭: 한국가톨릭 평신도사도직 중앙협의회)는 한국평협 인준과 매년 11월 어느 주일을 ‘평신도사도직의 날’로 제정해 줄 것을 주교회의에 건의했고, 주교회의는 같은 해 10월 14일-16일 개최된 추계 정기총회에서 한국평협 인준과 함께 구세주 대림 첫 주일을 ‘평신도의 날’로 제정했다. 이 날을 택한 이유는 이 시기가 한국교회 창설 주역의 한 분인 이승훈(베드로)이 1783년 동지사 일행을 따라 북경으로 가던 때와 맞먹기 때문이었다.

평소 미사와 다르게 평신도가 강론을 합니다. 성당에서 봉사를 하고 있고 마지막 봉사라 청년미사때 강론을 하였습니다.
개인적인 기록입니다.

2.

+찬미예수님…..

청소년위원회 회장으로 봉사하는 김형준 베네딕토입니다. 매년 청년회 회장이 하던 강론을 굳이 저에게 하라는 의미가 아마도 “봉사를 마무리하면서 되돌아 보라”는 뜻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매년 맞이하는 평신도주일. 다양한 생각으로 평신도주일의 의미를 묵상할 수 있지만 저는 소박하게 저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아내와 가끔 ”주님이 우리 가족에게 어떤 은총을 주셨을까”하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럴때 마다 40대말 제 회사가 망할 때 힘들어 하던 아내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아내가 신앙을 가진 계기중 하나입니다. 또 다른 계기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어려움속에서 아이들을 밝게 자라게 하고 싶은 엄마의 사랑이었습니다.

저에게 신앙을 권유한 이도 아내입니다.
“아이를 위해 함께 기도하자”고 하면서…

저나 아내의 신앙은 시련과 고통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몇 년후 저는 스스로 성당의 문을 두드리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되돌아보면 아이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제가 하는 사업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였지만 세속적으로 말하는 은총은 없었습니다. 다만 어려웠던 시기 힘들지만 큰 탈 없이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아이들이 뜻한 바를 위해 묵묵히 버팀목이 되었고 울음보다는 웃음이 많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지나고 나니까 주님은 저에게 평범한 일상이라는 은총을 주셨음을 고백합니다. 아이들이 좋은 대학을 간 것도 아니고 좋은 직장을 다니는 것도 아니지만 아프지 않고 아이들이 원하는 길을 힘들지만 묵묵히 가고 있음이 주님의 은총임을 고백합니다.

신앙을 가지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회사일로 작지만 계약을 할 때, 두 딸이 이런 저런 행사를 무사히 마칠 때, 코로나때 양가 부모님들이 큰 탈없이 건강하실 때, 운전할 때 깜박 졸았지만 무사할 때 둥둥 성호경을 그으면서 “감사합니다.”라고 혼자 조용히 고백합니다.

기도는 주님과의 대화라고 이야기합니다. 주님과 수없이 대화를 시도하였지만 저는 솔직히 주님을 느낀 경험이 없습니다.
“나의 믿음이 부족할까 “아니면 ”분심때문일까”
이런 질문을 하지만 답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코로나시기 주일 아침미사때입니다.
영성체가 끝나고 새벽성가대의 성가가 멀리서 들려옵니다.

”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 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조용히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이후 여러번 같은 성가를 들었지만 그 때의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위로를 받는듯 하였습니다. 마치 ”베네딕토야, 그동안 수고했어. 힘들었지…” 라고 속삭이는 듯 하였습니다. “주님이 저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신앙생활중 가장 많이 하는 행위가 기도입니다. 나와 내가족의 복를 위한 기도가 아닌 누군가 삶를 위한 기도. 주님은 이런 저의 기도를 누군가에게 전해주십니다. 제 기도가 누군가에게 주님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신앙 선조들에게 믿음은 삶이었습다. 신앙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선택하여야 했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지금은 다릅니다. 믿음은 교회에 나가서 미사를 참례하면 충분합니다. 믿음은 그저 교회에 머무를 뿐입니다. .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세례받기 전, 주일학교 아이들을 위한 아버지들의 삽겹살 모임이 성당마당에서 있었습니다. 어떤 분이 신앙에 대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주 내내 사회에서 범한 죄를 주일 교회에서 주님에게 용서받는다”

교회에서의 믿음과 사회에서의 삶이 나누어집니다. 우리의 신앙이 무엇일지 다시금 고민합니다.

신앙은,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을 넘어서 하느님과의 일치, 주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흔히 말하는 인생관이나 가치관이고 영성이라고 할 수도 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의 말씀을 묵상해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믿음에 머무르지 말고 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사랑이 무엇일까요? 평신도 사도직 교령이 있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때 만들어진 평신도교령은 평신도 사도직의 영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 평신도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도움을 활용하여, 일상생활의 현세 임무를 올바로 이행하면서도 그리스도와 이루는 일치와 자기 삶을 분리시키지 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기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이 일치 안에서 성장하여야 한다. 이렇게 평신도는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성덕에 정진하여야 하며 지혜와 인내로 어려움을 이겨 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

우리에게 탄생과 죽음을 제외하면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어쩔 수 없는 외퉁수도 있지만 어느 경우든 선택은 그 사람의 인생과 가치관을 반영합니다. 여기 시간과 재물이 있습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히 주어집니다. 똑같이 주어진 시간이지만 똑같이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성당 어떤 교우들은 일주일 몇 시간을 사회에서 가난한 이를 위한 봉사의 시간으로 만듭니다. 재물은 여러가지 이유로 불평등하게 주어지지만 각자 다르게 사용합니다. 주일 빈첸시오회 헌금함에 담기는 천원짜리 지폐는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하찮지만 주님의 기준으로 보면 큽니다. 천원은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마음입니다.

발칙한 상상을 해봅니다. 수태고지를 들은 성모 마리아에게 선택의 길이 놓여져 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길과 도망의 길이었을 겁니다. 열 몇살 소녀는 두려움속에서 이렇게 선택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믿음이 깊어지면 생각과 말과 행위가 같아집니다. 신앙인으로 세상에서의 선택, 사회에서의 선택이 주님의 가르침과 일치하는지를 생각합니다. 신앙과 삶이 함께 하는가를 생각합니다. 신앙인으로 부끄럽지 않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 고민이 삶에 스며들도록 노력하는가를 묵상합니다.

제가 기억하고 자주 되새기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3장30절 말씀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현세에서 제가 하는 일은 저를 드러내는 일이 아닙니다. 제가 아니라 주님을 영광되게 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선교는 우리가 주님의 꽃이 되어서 세상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일입니다. 길거리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지말고, 우리 삶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흔히 표현하는 선한 영향력입니다.

어릴 때 자주 부르고 나이 들어서도 좋아하는 동요가 있습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에 파랄거예요.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얗거예요”

파란 마음 하얀 마음 입니다. 성경에서 빛은 하느님을 상징합니다. 그러면마음의 빛은 무엇일까요? 성령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안의 빛이 꺼지 않도록 노력하고, 빛이 더욱더 커져서 사회를 밝게 비출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와 함께 하소서….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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