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관계와 인연에 대한 생각..

1.
신앙을 떠나서 사람이 만나서 관계를 만들 때 우선 생각하는 원칙이 있습니다.

“상하관계를 만들지 말자.”

상하관계를 만드는 방법은 여러가지 입니다. 한국이니까 나이가 우선이고, 학번을 따지고 지역을 따지고 군대도 따집니다. 온갖 종류의 인연을 따지고 찾아서 서열을 정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침팬지이론입니다. 살면서 어쩌다 보니 수직관계가 몸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평적인 관계이길 바랍니다.

약간 범위를 넓히면 성당도 비슷할 듯 합니다. 교우끼리의 관계도 그럴 수 있고 봉사자의 관계도 그럴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서열이 정해지는 것은 사제와 평신도의 관계입니다. 형식은 영적인 지도이지만 내용은 사실상 지휘감독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참 바뀌기 힘든 구조입니다. 교황은 “함께 걸어가자”고 하지만 함께 걸어가지 못합니다.

여기에 봉사자끼리의 관계도 한몫합니다. 봉사의 전제는 겸손이고 “나를 낮추고 가장 어려운 사람을 위해 가장 낮은 자리를 가야 하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신앙이지만 사회에서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됩니다. 사회에서 무슨 자리에 있으면 비슷한 모습으로 관계를 맺습니다.

전례력을 기준으로 하면 11월말이면 긴 본당 봉사의 시간이 끝입니다. 자의반 타의반에서 시작한 봉사라 이번에는 자의로 그만둡니다. 의지로 그만둡니다.(^^) 앞으로 머리가 아닌 몸으로, 마음으로 하는 봉사를 해볼까 합니다. 무엇이 될지 모르지만… 입교하러 처음 수녀님과 면담할 때 했던 저의 다짐이기도 합니다.

2.
몇 년전 중고서적으로 산 피터 브라운이 쓴 ‘아우구스티누스’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번역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아서 몇 번이 포기했다가 다시 읽고 다시 읽었던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놀라웠던 점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이단과 관련한 부분입니다. 신학적인 논쟁이야 예나 지금이나 필요하지만 논쟁이 논쟁으로 끝나지 않더군요.

로마시대 주교라는 직책이 가진 권한은 막강합니다. 이단으로 규정하면 행정권력에 요청하여 이단세력을 처벌하고 몰아낼 수 있는 권한을 가집니다. 공의회로 표현하는 신학적 권력투쟁. 이면을 보면 피비린내가 납니다. 우리가 현재 아는 교리의 대부분은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초기 기독교가 다양성을 포기하고 하나의 교리를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고 하면 현대의 기독교는 다양성을 포용하는 교리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을 듯 합니다.

3.
대부분 이런저런 인연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가장 가까운 인연은 부부의 연이고 가족의 연입니다. 물론 학연, 지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특정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동업자 인연도 있습니다. 대학 운동권으로 오랜동안 만났던 친구가 이번에 차관이 되었습니다. 축하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마냥 축하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입니다. 박근혜도 그렇고 윤석열 정책을 도저히 지지할 수 없기때문입니다. 단순 지지라고 하면 덜 복잡하겠지만 젊은 시절 나의 꿈을 뿌리부터 흔드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없는 소리로 “축하한다…”라는 톡을 도저히 올릴 수 없어서 그냥 이모티콘을 올렸습니다..

점점 호불호가 명확해지네요. 싫으면 점점 보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보고 싶은 사람도 함께 하는 시간도 부족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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