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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에 배달된 한겨레신문을 펼칩니다. 어떤 신문을 보더라도 앞에서 보지 않습니다. 맨 마지막 사설과 칼럼부터 읽습니다. 사설은 너무 정형화되었고 칼럼을 보고 사회문화 및 국제 관련 기사를 살피고 덮습니다. 눈길이 가지않던 ‘왜냐면’. 흥미로운 제목이 들어옵니다.
읽는 내내 아프고 아프고 또 아픕니다. 먹먹합니다.
○○전자는 파견 노동이 아니다. 기륭은 파견 노동이었다. 그래서 고용불안은 덜했다. 왜냐면 자기가 견디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나 불규칙적이고 강한 노동 강도 때문에 국내 노동자는 거의 견디지 못한다. 고용불안 대신 지옥 같은 노동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중소 영세업체에서는 정규직, 비정규직 따질 것 없이 엄청난 장시간의 노동과 사람이 견딜 수 없는 노동 강도를 강요당하고 있다. 스스로 몇 달을 견딜 수 없으니 1년 2년 고용계약 기간이 뭔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고용불안은 결국 노예 노동을 견디는 강요 과정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고 낯선 것이 있었다. 50명 정도니 사장 등은 마치 큰오빠가 막내 동생 혼내듯 정이 가득한 듯이 지적한다. 하지만 그 내용은 아무런 권리 없이 의무만 지는 노동을 수용하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노동 강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거기서 기륭전자에서 만났던 노동자를 다시 만났다. 기륭전자에서 정규직으로 일을 하면서 손 빠르고 일 잘한다고 소문이 났던 친구였다. 하지만 그 친구도 일주일을 못 견디고 그만두었다. 그때 그 친구가 한 말은 “언니 나 여기서 도저히 컨베이어 속도를 맞출 수 없어. 견딜 수 없어요”였다. 나도 일의 강도를 견디지 못해 몸이 아팠다. 견디고 일을 했지만 보기에 도저히 안됐다고 봤는지 사모가 와서 일찍 퇴근해서 병원을 가라 한다.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공장, 그리고 작업이 죽음에 이르는 현장. 아직도 세상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내가 맨 처음 공장에 간 것은 1986년 라면을 만드는 삼양식품이다. 그때는 주야 맞교대였고 참으로 봉건적이었는데 그때 노동이나 지금 노동이나 도대체 구별할 수 없는 지경이다. 20년을 넘게 나름 좋은 노동을 위해 일을 했는데…. 참 서러웠다.
우리가 나이가 든 걸까? 이놈의 세상이 사람을 기계보다 더 강력하게 여기고 다그치는 것일까?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의 설움에 저항했지만 그사이 우리 시대 공장 현실은 이주노동자들의 설움과 눈물과 고통 속에 더욱더 악화되어 있었다. 일이라는 것이, 그래 경제라는 것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어떻게 돈 때문에 사람을 다 죽이는 것이 됐는지 정말로 억울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별도 없이 하루하루를 견뎌야 하는 공장, 참으로 깜깜했다. 1986년이나 2011년이나 다를 것 없는 현장, 정말 나로서는 견딜 수 없는 노동 강도, 여기에 이미 적응한 노동자나, 휴식시간이나 식사시간을 희생해야 하는 노동자의 현실을 보면서 오랜 투쟁, 일상적인 연대 투쟁의 피로에 투덜대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장기 투쟁보다 더 고된 노동의 현장을 보며, 그 현장의 고됨에 적응하지 못한(?) 내 모습을 돌아보며 함께 환하게 웃는 세상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인지…. 희망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살아 있는 것인지. 하지만 내가 기륭투쟁을 통해 배운 것이 있다. 희망은 포기하지 않는 이들의 몫이라는 것을.
오석순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
[왜냐면] 1986년이나 2011년이나, 이 지옥 같은 노동은중에서
오석순씨는 1986년이나 2011년이나 지옥같은 노동이라고 했습니다. 읽으면서 떠오른 장면이 있습니다.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했던 분들의 기록입니다. 그중 전태일열사가 박정희대통령에게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존경하시는 대통령 각하
옥체 안녕하시옵니까? 저는 제품(의류) 계통에 종사하는 재단사입니다.
각하께선 저들의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혁명 후 오늘날까지 저들은 각하께서 이루신 모든 실제를 높이 존경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길이길이 존경할 겁니다. 삼선개헌에 관하여 저들이 알지 못하는 참으로 깊은 희생을 각하께선 마침내 행하심을 머리 숙여 은미 합니다. 끝까지 인내와 현명하신 용기는 또 한번 밝아오는 대한민국의 무거운 십자가를 국민들은 존경과 신뢰로 각하께 드릴 것입니다.저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쌍문동 208번지 2통 5반에 거주하는 22살 된 청년입니다. 직업은 의류계통의 재단사로서 5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직장은 시내 동대문구 평화시장으로써 의류전문 계통으로썬 동양 최대를 자랑하는 것으로 종업원은 2만 여명이 됩니다. 큰 맘모스 건물 4동에 분류되어 작업을 합니다. 그러나 기업주가 여러분인 것이 문제입니다만 한 공장에 평균 30여명은 됩니다. 근로기준법에 해당이 되는 기업체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못 받으며 더구나 2만 여명을 넘는 종업원의 90%이상이 평균 연령 18세의 여성입니다. 기준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써 어떻게 여자에게 하루 15시간의 작업을 강요합니까? 미싱사의 노동이라면 모든 노동 중에서 제일 힘든(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노동으로 여성들은 견뎌내지 못합니다.
또한 2만 여명 중 40%를 차지하는 시다공들은 평균연령 15세의 어린이들로써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기에 있는 이들은 회복할 수 없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인 것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전부가 다 영세민의 자녀들로써 굶주림과 어려운 현실을 이기려고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하루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사회는 이 착하고 깨끗한 동심에게 너무나 모질고 메마른 면만을 보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각하께 간구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착하디 착하고 깨끗한 동심들을 좀더 상하기 전에 보호하십시오. 근로기준법에선 동심들의 보호를 성문화하였지만 왜 지키지를 못합니까? 발전도상국에 있는 국가들의 공통된 형태이겠지만 이 동심들이 자라면 사회는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근로기준법이란 우리나라의 법인 것을 잘 압니다. 우리들의 현실에 적당하게 만든 것이 곧 우리 법입니다.
잘 맞지 않을 때에는 맞게 입히려고 노력을 하여야 옳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 기업주들은 어떠합니까? 마치 무슨 사치한 사치품인양, 종업원들에겐 가까이 하여서는 안 된다는 식입니다.
저는 피끓는 청년으로써 이런 현실에 종사하는 재단사로써 도저히 참혹한 현실을 정신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저의 좁은 생각 끝에 이런 사실을 고치기 위하여 보호기관인 노동청과 시청 내에 있는 근로감독관을 찾아가 구두로써 감독을 요구했습니다. 노동청에서 실태조사도 왔었습니다만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1개월에 첫 주와 삼 주 2일을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썬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 버립니다. 일반 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일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 여공들은 6년 전후의 경력자로써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한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 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응당 기준법에 의하여 기업주는 건강진단을 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을 기만합니다.
한 공장의 30여명 직공 중에서 겨우 2명이나 3명 정도를 평화시장주식회사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상의 진단을 마칩니다. X레이 촬영 시에는 필림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 지시나 대책이 없습니다. 1인당 3백 원의 진단료를 기업주가 부담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전부가 건강하기 때문입니까?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하루 속히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한 여공들을 보호하십시오. 최소한 당사들의 건강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정도로 만족할 순진한 동심들입니다.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 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 아픈 곳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
1일 10시간 – 12시간으로,
1개월 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2.
1970년이나 1986년이나 2011년이나 노동은 여전히 지옥과 같습니다. 나는 세상이 바뀌고 발전했다고 생각했지만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은 여전히 70년대와 같은 지옥같은 작업장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식민지가 있습니다. 그곳엔 인권도 없습니다. 그저 노예가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