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진성사를 받은 날의 묵상

1.
2012.04.15. 세례를 받은 날입니다. 세례를 받은지 456일째 되는 날 견진을 받았습니다. 어제입니다. 견진성사는 세례받은 신자가 받는 성사로서 주교의 안수와 크리스마 성유의 도유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 즉 성령의 은혜를 받는 성사이며 그리스도인의 성년식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리로 보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리로 내려가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였다.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는 받았지만 아직 성령은 받지 못했던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손을 얹자 그들도 성령을 받게 되었다.”(사도 8,14)

성년인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일까요? 신앙을 가진 사람마다 다양한 생각이 있을 듯 합니다. 저는 두가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제 미사중 봉독된 말씀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 율법서에 쓰인 그분의 계명들과 규정들을 지키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누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 하고 말할 필요가 없다. 또 그것은 바다 건너편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누가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 하고 말할 필요도 없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 30,10-14)

그때에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25-37)

“말씀은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하고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는” 신앙인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아닐까 합니다.

2.
아침에 신문을 읽으면서 또다른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길희성선생님이 쓰신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의 서평중 한마디입니다.

선교만을 앞세우고 독선적이고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이들이 크리스천이 아니라고 말한다. 안디옥교회에서 제일 먼저 사용한 ‘크리스천’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를 따르는’이란 형용사로, 그리스도교라는 조직의 일원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며 그의 인격을 닮고자 하는 사람의 내적 정신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중에서

길희성선생님이 쓰신 다른 글은 좀더 깊게 적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경우 “크리스챤”이라는 말이 본래 지녔던 뜻이 그러했다. 크리스챤이라는 말은 본래 기독교라는 교회집단에 소속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은”, “그리스도를 닮은”, 혹은 “그리스도를 따르는”이라는 형용사적 의미를 지닌 말이었다.다시 말해, 기독교가 채 제도화되기 이전의 이른바 “원시 기독교” 시대 기독인들을 지칭하던 말로서, 기독교라는 제도나 조직의 일원이라는 외적 모습보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며 그의 인격을 닮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내적 정신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종교를 명사로서 이해하는 것과 형용사로 이해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명사화된 종교가 제도화된 종교, 물상화된 종교, 명확한 배타적 경계선과 울타리를 지닌 단체 내지 조직으로서의 종교라면, 형용사로서의 종교는 내적 정신으로서의 종교, 마음의 성품과 삶의 태도로서의 종교이며, 한 종교의 신자들뿐 아니라 비신자들, 심지어 타 종교의 신자들까지도 포함될 수 있는 종교이다. 가령 기독교를 그리스도의 정신, 기독교적 정신을 뜻하는 말로 이해한다면,
예수 닮은 스님, 부처 닮은 목사중에서

“말씀은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하고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는” 신앙인이 곧 “제도나 조직의 일원이라는 외적 모습보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며 그의 인격을 닮고자 하는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그저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고 성경을 열심히 읽기만 하는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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