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성지순례 – 해미성지

1.
한동안 성지순례를 하지 않았습니다. 텃밭이 주는 생명과 땀이 마음을 평화롭게 하였습니다. 겨울 자전거는 다리를 힘들게 하기때문이기도 합니다. 다시 봄. 산천이 파릇파릇한 신록으로 변해가는데 세월호 참사로 어린 생명들이 먼 곳으로 떠난 우울한 봄입니다. 어디론가 움직이고 싶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방한하십니다. 교황께서 방문하시는 곳중 해미성지가 있습니다. 인구에 회자하는 성지들이 유명한 성인들과 함께 하지만 해미성지는 다릅니다. 해미성지를 알려면 해미성지가 자리잡은 해미고을의 역사를 알야아 합니다.

속칭 “해뫼”라 일컬어지는 해미 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 절도사의 치소를 둔 곳으로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400-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하여 지역 통치를하던 곳이다. 내포일원의 해안 국토수비를 명목으로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독자적으로 처형하는 권한을 가진 해미고을의 수령은 100여년 동안 온갖 방법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한겨레 신문의 곽병찬 기자는 칼럼 향원익청(香遠益淸)에서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병인년부터 시작된 천주학 토벌은 1868년에 이르러 극성했습니다. 감옥에서 100보쯤 떨어진 곳에 오래된 회화나무 한 그루 서 있습니다. 문초 중에 얻어터지고, 주리 틀려도 배교하지 않은 사람들이 매달리는 나무였습니다. 서문 쪽 활터엔 장졸들이 시위에 활을 먹이고 회화나무에 걸린 이들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떠나는가, 죽음이여 화살보다 빨리 오라. 그러나 왜 그리도 질긴지, 화살은 비켜 갔습니다.
진남문으로 또 한 무리의 형제들이 끌려옵니다. 이젠 저들에게 옥사를 내주고 떠나야 합니다.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로 둘러쳐진 지성문(서문)을 나서야 합니다. 성안의 하수가 흘러나가고, 옥사한 주검이 실려 나가고, 처형당할 이들이 나가는 곳입니다.

서문 문간엔 십자가며, 묵주며, 천주책이 널려 있습니다. “밟아라, 앞으로는 믿지 않겠노라고 한마디만 하라. 그러면 이 문은 살아나가는 문이 될 것이고, 아니면 지옥의 문이 되리.” 문밖은 지옥도 그 자체였습니다. 교수형, 참수는 양반이었습니다. 돌구멍에 꿴 줄에 목을 맨 뒤 지렛대로 줄을 조여 숨을 끊거나, 돌바닥에 엎드려 놓고 긴 돌기둥을 내리눌러 압사시키거나, 한지로 덮은 얼굴에 물을 부어 질식시키는 등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도랑 위 자리개 돌에 사람을 패대기쳐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대기자는 늘었습니다. 형리는 다시 끌고 갔습니다. 핏물 흥건하고, 피비린내 진동하는 도랑을 따라 걸었습니다. 곧 해미천 건너 조산리 들입니다. 개울 가까이엔 깊은 둠벙이 있었습니다. 웬만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습니다. 형제들 등에 맷돌 따위가 하나씩 묶였습니다. 한명씩 둠벙으로 밀려 들어갔습니다. 둠벙이 차자 인근 숲정이로 갔습니다. 곳곳에 널찍한 흙구덩이가 파헤쳐져 있었습니다. 남은 이들이 들어갈 구덩이였습니다. 형제들은 그 속에서 무릎 꿇었습니다. 흙더미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홍주에서 오신 문 마리아님도 박 요한님도 모두 기도했습니다. 먼 훗날, 밭을 갈던 농부의 쟁기 끝에 걸려 드러난 인골들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던 건 무릎 꿇은 채 생매장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해미 회화나무에서 여숫골까지, 희생의 묵상중에서

이렇게 죽임을 당한 이들은 이름 없는 백성이고 민초들이었습니다. 천주교를 통하여 새로운 세상을 그렸던 이들이고 처참한 이세상 보다는 평등한 저세상을 택하였셨습니다.

“…정벌 나간 남편은 못 돌아오는 수는 있어도/ 예부터 남자가 생식기를 잘랐단 말 들어 보지 못했네/ 시아버지 상에 이미 상복 입었고 애는 아직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조자손 삼대가 다 군적에 실리다니/ 급하게 가서 호소해도 문지기는 호랑이요/ 향관은 으르렁대며 마구간 소 몰아가네/ 남편 칼을 갈아 방에 들자 자리에는 피가 가득/ 자식 낳아 군액 당했다고 한스러워 그랬다네/ …부호들은 일 년 내내 풍악이나 즐기면서/ 낟알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는 일 없는데/ 같은 백성인데 왜 그리도 차별일까?…”

2.
그동안 자전거 성지순례는 자전거만 함께 했지만 해미성지는 충청남도 서산에 위치해 시외버스와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과천에서 안양천을 따라 안양시외버스터미날로 갔습니다. 도착하니까 8시 조금 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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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시외버스터미날에 도착하고 해미성지를 물었습니다. 무척 간단하더군요. 해미성지로 이어진 국도를 타고 직진합니다. 거리도 멀지 않습니다. 10Km 내외입니다. 한참 달리다 보니까 사진으로 보았던 해미순교성지가 보이더군요. 11시를 앞둔 시각이었습니다. 11시 미사에 참례하려고 소강당에 들어섰습니다. 대부분 성지들이 그럿듯이 전통적인 문양으로 아름다우면서 소박하게 지은 건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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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말미 어린이날이라고 하여 미사에 참례한 어린이에게 해미 순교보혈 묵주를 선물하셨습니다. 묵주는 성지에 자라고 있는 무환자(無患子) 나무 열매를 수확하여 성지 직원들이 만든 묵주입니다. 생매장 성지에서 순교자들의 피가 거름되어 자란 나무로서 열매 색깔도 피가 응고된 색깔과 비슷하여 해미 순교보혈 묵주라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저도 성물방에서 하나 샀습니다. 얼마전 자전거로 출근하다가 묵주를 잃어버렸습니다.

대성전 뒤에 무덤 모양으로 해미성지 순교기념관을 만들어놓았습니다. 입구에 조각해 놓은 문양이 순교자들이 겪었을 고통을 보여줍니다. 아비규환(阿鼻叫喚)이 따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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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성지를 가든 항상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으며 기도를 바칩니다. 십자가의 길에 놓여져 있는 표지석에 새겨진 그림이 신앙선조들이 겪었던 고통을 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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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해미순교성지에 깃든 역사는 참혹합니다. 해미읍성 또한 고문과 학살의 현장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백여년전 일입니다. 그 때의 기억을 간직한 이들은 없습니다. 과거입니다. 순교성지와 해미읍성은 너무나 아름답고 고요합니다. 오월 어린이날. 참으로 맑고 햇살이 찬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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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성읍에 유명한 나무 한그루가 있습니다. 회화나무로 ‘호야나무’라 합니다. 오랜 전 나뭇 가지에 산 채로 목을 걸었던 나무입니다. 지금은 나뭇가지 아래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해미성지에서 순교한 이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천주교는 평등한 세상을 약속하였습니다. 가난과 고통이 없는 세상입니다. 백여년이란 시간이 지났습니다. 지금 천주교는 그런 세상을 만들었나요? 천주교 신앙공동체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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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조현기자는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그래서다. 이제는 다시 물을 때다. 동양인들을 귀신이나 숭배하며 제사 지내는 미개 인종들로 천시한 천주교는 과연 미신 이상의 신앙을 세웠는가.

조선 유교를 반상 차별의 부정의한 종교 사상으로 질타한 천주교는 강자보다는 약자 편에서 불평등을 해소하고, 유교 선비 이상의 정의·윤리·도덕을 실현하고 있는가.

지금은 가난한 자, 정의를 외치는 자가 자본과 권력에 의해 핍박받는 새로운 박해시대다. 박해와 순교를 상징으로 내세우는 한국 천주교는 지금 이 시대엔 박해자와 순교자 중 과연 어느 쪽에 서 있는가. 순교자들의 땅에선 이런 물음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기다리고 있다.
교황을 기다리는 물음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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