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말 새벽 퀭한 눈을 부시시 비비면서 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영화 ‘Encounters at the End of the World’입니다. 배우 김희애가 ‘꽃보다 누나’에서 자그레브 성당을 찾아 기도할 때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는 장면과 겹쳤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대성당의 웅장함에서 느끼는 경외감과 같은 경외감이 아닐까 합니다.
철학자이면서 지게차 기사로 일하고 있는 스테판 파쇼브는 시인 앨런 와츠의 말을 빌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대변합니다.
우리는 우리 눈을 통해 우주의 존재를 인식한다. 또한 우리의 귀를 통해 우주의 조화를 경청한다. 우리 인간은 우주의 영광스러움과 장엄함을 목격하는 유일한 목격자다.
‘목격자’로써 느끼는 감정은 경외감입니다. 자연에 대한 겸손함입니다. 1900년대 초 남극을 탐험한 이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최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었습니다. 2000년대 남극은 어떨까요? 헤어조크는 상업등정대가 에베레스트를 퇴색시키는 것과 같은 징후를 남극에서 발견합니다.
문화적으로 따져보면 이곳은 모험의 끝을 의미한다.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미지의 세계를 발견한 것은 좋지만 남극점이나 에베레스트 산이 위엄과 평화를 잃은 것은 슬픈 일이다. 지도상에 흰 점 몇 개는 남겨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제 인간은 모험에 대한 초심을 잃었고 기네스북에 오르는게 쟁점이 됬다.스콧과 아문센은 초창기 탐험의 주역들이다. 그때부터 탐험은 우스꽝스럽게 퇴보하고 있다. 한 프랑스인은 후진기어를 넣고 사하라 사막을 건넜다고 한다. 나는 맨발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는 첫 번째 주자를 기다리고 있다. 혹은 스카이 콩콩으로 처음 남극점에 도달한 사람을 기다린다.
인간이 우주의 목격자가 아니라 파괴자가 되어갑니다.
2.
흰 눈으로 덮힌 남극대륙만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남극은 대륙만 아닙니다. 커다란 빙하로 뒤덮힌 바다도 남극입니다. 남극의 바다는 장엄합니다.
남극 하면 떠오르는 생명이 ‘펭귄’입니다. 헤어조크는 다른 시각으로 펭귄에 접근했습니다. 그 중 인상깊이 남은 장면입니다.
이 때 헤어조크의 내래이션은 다음과 같습니다.
“펭귄들은 전부 오른쪽 바다쪽으로 가고 있다. 가운데 있는 한 마리가 눈에 띄는데, 녀석은 빙하 가장자리에 있는 먹이 먹는 곳으로 가지 않았고 무리에게 돌아가지도 않았다. 조금 뒤에 보니 70km나 떨어진 산 쪽으로 가고 있었다. 에인리 박사(펭귄 전문가) 말로는 잡아다가 무리 속에 두어도 다시 산으로 갈 거라고 했다.
그러나 왜…?
방향 감각을 잃은 펭귄 한 마리가 뉴 하버 잠수부 캠프에 나타났다. 서식지에서 80km나 떨어진 곳이다. 사람들은 펭귄을 손으로 잡거나 방해해서는 안 된다. 조용히 서서 길을 가게 놔둬야 한다. 녀석은 지금 광활한 대륙을 향해 가고 있다. 5,000km 앞의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죽음’입니다. 그렇지만 달리 보면 도전입니다.
아주 오래전 아프리카 어느 곳에 호모 에렉투스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 혹은 몇이 새로운 길을 찾아나섰습니다. 북쪽으로 향했던 호모 에렉투스중 다수는 죽음을 맞이 했습니다. 그렇지만 몇은 살아남아 오늘에 이릅니다. 호모 사피엔스. 방향 감각을 잃은 펭귄 한 마리가 아주 오랜 후 새로운 종의 시작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자연은 위대합니다.